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서초사옥에서 삼성 깃발이 펄럭이고 있다.뉴시스

“1위를 달성한 지금이 위기의 시작점일지 모른다.”

권오현 삼성전자 회장이 지난 1일 삼성전자 창립 48주년 기념식에서 강조한 말이다. 권 회장은 이어 “다가올 10년은 사회 및 인구구조, 기술혁신 등에서 엄청난 변화가 예상되며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 등으로 산업은 급변하고 경쟁은 치열해질 것”이라며 “이런 시기에 기존의 방식으로 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명확하다”고 위기의 구체적 양상도 제시했다.

맞다. 밖에서 봐도 삼성전자는 진짜 위기다. 기록적 실적을 올린 반도체, 아이폰과 1위를 다투는 갤럭시, LCD와 OLED 등의 세계 정상급 제품들을 거느리고 있지만, 제조업체의 한계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AI와 IoT로 상징되는 소프트웨어의 힘이 향후 10년을 좌우할 텐데 이 분야에서는 성공사례를 찾기 힘들다.

삼성전자가 갤럭시S8를 내놓으며 전용 버튼을 만들 만큼 심혈을 기울였던 ‘AI 비서’ 빅스비는 여전히 한국어 영어 이외의 외국어 서비스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성능도 경쟁사 애플의 ‘시리’에 한참 뒤떨어진다는 평가다. 2016년 2,400억원이 넘는 돈을 투자해 인수한 인공지능 음성기술 분야 최고 업체 비브랩스의 기술력과 3,000명이 넘는 삼성의 일류 개발자들이 투입돼 심혈을 기울였는데도 말이다. 비브랩스는 애플의 시리를 성공시킨 기술자들이 애플을 떠나 만든 회사다. 삼성전자가 애플과 안드로이드에 맞서기 위해 자체 개발해 2012년 출시한 스마트기기 운영체제(OS) 타이젠 역시 비슷한 처지다. 올해 초 삼성전자는 “반격이 시작된다”고 장담했지만, 시장 점유율은 속절없이 하락해 0%에 근접하고 있다.

현재 경쟁자를 찾아볼 수 없는 지존인 반도체 역시 불안하다. 삼성전자의 반도체 분야 전문가들은 “D램과 낸드플래시 이외의 다른 차세대 기술을 연구하고 있지만, 인텔이나 퀄컴에 비교하면 기술 잠재력도 뒤떨어지고 연구 비전도 뚜렷하지 않다”고 말한다.

이미 존재하는 제품을 잘 만드는 기술력은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삼성전자가 왜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만드는 데는 그 기술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걸까.

그 동안 이와 관련해 상명하복 식 조직문화, 창의력을 발휘할 틈 없는 과도한 근무시간 등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제기돼 왔다. 하지만 삼성전자를 잘 아는 인사들의 분석을 종합하면 가장 심각한 문제는 과도한 내부경쟁이다. 그 근본에는 DS(반도체ㆍ디스플레이), CE(소비자 가전), IM(IT, 모바일)으로 나뉘는 3개 부문 간의 경쟁 구도가 놓여 있다. 단순화해 설명하자면, 삼성전자 직원들은 연말 성과급을 더 받기 위해서는 외부 경쟁사보다 앞서야 할 뿐 아니라, 다른 사업부문보다도 뛰어난 성과를 만들어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사업부문 간 정보공유나 협조는 기대하기 힘들고, 부문 사이에 중복 연구나 투자도 적지 않았다. AI와 IoT의 발전과 함께 모든 제품이 하나의 운영체제로 묶이는 융복합 추세를 따라잡기 힘든 기업문화가 오랫동안 유지 장려돼 온 셈이다.

게다가 매년 연말 시행되는 사장단과 임원 인사가 엄격한 실적 위주로 진행되다 보니, 기존 임원은 일 년짜리 단기 성과에 매달리게 된다. 단기 성과에 매달리다 보면, 실패를 용납하지 못하게 되고, 실패하지 않으려다 보면 새로운 발상이 싹을 틔우기 힘들다.

삼성전자도 이런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삼성리서치’의 신설이 그것이다. 삼성리서치는 완제품 부문의 선행 연구를 담당하던 정보미디어(DMC)연구소와 소프트웨어센터를 통합한 연구소다. 이제라도 가전, 스마트폰 부문이 결합해 한곳에서 함께 연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는 첫발일 뿐이다. 3개 사업부문 각각이 글로벌 정상급 기업인 삼성전자가 진정한 시너지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이들을 통합할 구체적 비전과 실패를 장려하는 긴 안목의 경영이 정착돼야 한다. 그것도 한시라도 빨리.

정영오 산업부장 young5@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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