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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들녘에 서서

입력
2017.11.01 15:07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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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모 수도원에 강의를 하러 갔습니다. 그 수도원은 도시에 있지 않고 익산의 한 들판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마 김제 평야 가운데 있을 겁니다. 하루의 강의를 다 마치고 한동안 시간을 내지 못해 뛰지 못했던 마라톤을 오래간만에 하였는데, 마땅한 길이 없어 오래간만에 농로를 달렸습니다. 그런데 뛰면서 보니 황금들녘이 반 이상 가을걷이를 마쳤고, 남은 들판도 이 논배미 저 논배미에서 한창 기계로 추수와 탈곡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땀 흘리는 분들의 일손을 거드느라 땀 흘려야 마땅하거늘 한가롭게 그분들 가운데를 뛰어가는 게 죄스러워 눈에 안 띄게 지나가려는데 뛰느라 땀 흘리는 저를 보시고 “욕보십니다” 하고 되레 인사를 건네십니다. 저는 죄스러워 인사도 못 건넸는데 인사를 해오시고, 더 욕보시는 분이 한가롭게 뛰는 제게 욕본다고 하시니 그 송구스러움이 마중물이 되어 지난 송구스러움까지 다 끌어올리는 거였습니다.

저의 고향도 지금은 수원이지만 옛날에는 화성군에 속한 시골이었고, 제가 살던 마을도 이곳처럼 들판 가운데 있어서 추억이 다 들판의 추억입니다. 그래서 다른 친구들이 산과 강이나 바다를 낀 다양한 추억을 얘기하면 그들이 부럽기도 하고 제 고향은 너무 추억거리가 없다고 제 고향을 무시했는데 그 송구스러움이 우선 떠올랐습니다.

이분들이 흘린 땀 덕분에 우리가 편히 잘 먹고 사는데 그 수고를 알아드리지 않았던 송구스러움이 그 다음입니다. 농촌의 이분들이 이 가을걷이를 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땀을 흘리고 노심초사해야 하는지 저도 열여섯 살 서울로 유학 오기 전까지 농촌살이를 했기에 조금은 알지요. 저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어렸어도 뭔가 해야 했는데 예를 들어 모내기 전에 논에 물을 댈 때가 기억이 납니다. 지금처럼 수리시설이 잘 되어 있지 않던 때 논에 물 대는 것은 그야말로 전쟁이었는데 이런 전쟁터에서 어린 제가 낮에 물 대는 것은 어림도 없고 그래서 새벽 한두 시에 나와 물을 댔습니다. 그때 보이지는 않지만 저희 논에 물들어가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그렇게 뿌듯하고, 지금도 봄철 논에 물이 그득하면 그렇게 마음이 푸근합니다. 이렇게 농사가 시작되어 모내기, 김매기, 약 치기, 피 뽑기, 쓰러진 벼 세우기, 메뚜기나 새 쫓기에 홍수걱정과 가뭄걱정까지 다 거쳐야 수확을 하는 것이니 그 수고와 노심초사가 정말 대단한데 낟알은 바로 그 결실이지요.

그런데 저의 송구스러움은 농부들에게만 있지 않습니다. 곡식들과 들판의 물, 공기, 바람, 태양 등 모든 것들에게 송구스럽습니다. 벼는 물론 콩이나 깨나 고추와 같은 온갖 작물은 한 여름 땡볕을 다 견뎌낸 것들입니다. 우리는 한 여름에도 냉방이 된 실내에서 편히 있을 때 그야말로 화상을 입어가며 영근 것들이지요. 그리고 농부와 마찬가지로 물, 공기, 바람, 태양도 이것들이 영글도록 적절하게 사랑을 보태었지요. 고추가 빨갛고 벼가 황금빛인 것은 수고(受苦)의 사랑 때문입니다. 영어의 Passion은 ‘불타는 열정’의 뜻이 있지만 더 깊은 뜻은 ‘불에 타서 죽어도 좋은 사랑’, ‘수고의 사랑’입니다.

저는 지지난 주 친지들과 휴가를 겸하여 설악산으로 단풍놀이를 다녀왔습니다. 마라톤을 마치고 들녘에 서서 땀을 식힐 때 그래서 저는 또 송구스러웠습니다. 설악산의 단풍은 보러 다녀오고 이 황금들녘과 빨간 고추는 보러 오지 않은 것이 말입니다. 그래서 들녘에 서서 면피용일지 모르지만 다짐도 해보았습니다. 내년에는 단풍놀이 대신 들녘 나들이를 하는 것 말입니다. 일손을 크게 거들지는 못할지라도 막걸리라도 한 잔 따라드리기 위해서. 그리고 수고하셨다고, 수고의 사랑에 감사하다고 아양 떨며 콩 튀기를 하기 위해서라도.

김찬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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