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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1년] “촛불 이후, 나는 비로소 국민이 되었다”

입력
2017.10.28 04:40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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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평화적 정권교체 이룬 광화문집회

정치 냉소주의 젖어있던 국민에게

민주주의의 열망ㆍ주권의식 일깨워

#2

서울에서 약국 운영하는 50대

직원에 최저임금 1만원 지급

“내 삶 속에서 촛불정신 계승”

#3

“우리가 나서야 사회가 바뀝니다

文정부는 촛불항쟁의 대리 정부”

촛불이 새 정치적 시공간 열어

촛불혁명이1주년을 맞았다. 한국사회에 새로운 시공간을 열어젖힌 촛불로 인해 이 나라의 주권자들은 촛불 이전과 결코 동일한 사람이 될 수 없다. 나에게 촛불은 무엇이었으며, 촛불은 나를 어떻게 바꾸었을까. 홍인기 기자
촛불혁명이1주년을 맞았다. 한국사회에 새로운 시공간을 열어젖힌 촛불로 인해 이 나라의 주권자들은 촛불 이전과 결코 동일한 사람이 될 수 없다. 나에게 촛불은 무엇이었으며, 촛불은 나를 어떻게 바꾸었을까. 홍인기 기자

2016년 11월 26일 토요일 밤. 회사원 임석규(45)씨는 서울 광화문광장의 어둠 속에 섬처럼 잠겨 있었다. 춥고 새까만 밤 사람들은 서로의 온기로 존재를 확인하며 흐느끼듯 숨죽이고 있었다. 그때 정적이 내려앉은 광장 위로 흘러나오기 시작한 꼬마 아이의 흥얼거리는 노랫소리.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무대 위 사회자의 구령에 따라 어둠 속의 시민들이 동시에 촛불을 켰다. 순식간에 광장을 밝힌 광대한 빛에 찌르듯 두 눈이 부셨을 때, 임씨는 왈칵 울음을 터트렸다. ‘나는 혼자가 아니었구나. 이 헬조선에서 숨을 쉴 수가 없었던 게 나 혼자만은 아니었구나.’ 흩뿌려진 섬들이 연결되던 추운 겨울의 광장에서, 그는 전율했다.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저는 늘 사람들에게 정치가 실망스러울수록 관심을 가지라고 말하던 사람이었어요. 92학번으로 운동권 마지막 세대고, 사회적 이슈에 관심이 많았죠. 그런데 그런 저도 이 나라에 대한 회의와 환멸을 떨칠 수가 없더라고요. 세월호의 아이들, 백남기 농민의 죽음…. 숨기고 탄압하고 가로막고 찍어 누르던 정권에 지쳐 친구를 만나도 가족이 모여도 다들 정치 얘기는 하지 말자고 했죠. 이 나라에서 살기 싫었습니다. 대한민국이 수치스러웠어요.”

처음 촛불이 켜졌던 지난해 10월 29일로부터 어느덧 1년. 종종 이민을 생각하던 임씨에게 지난 사계절은 다시 대한민국 국민으로 복귀하는 시간이었다. 주말부부임에도 서울과 광주를 오가며 23차례 열린 촛불집회에 총 12번을 참여했다. 청와대에 들리도록 함성을 내지르면서, 국민을 우습게 알고 권력을 사유화했던 대통령을 마침내 끌어내리면서, 한국 시민으로서 오래 앓던 정치적 우울과 상처를 조금씩 치유했다. 정치혐오를 서서히 잊어버렸다.

“저는 에버트인권상의 수상자입니다.(웃음)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게 자랑스럽고 뿌듯해요. 이제는 어디서건 자연스럽게 정치 얘기를 나누죠. 정치가 우리 삶의 이야기라는 걸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됐으니까요.”

독서토론강사 오숙희(35)씨는 지난 겨울 8세, 6세, 3세였던 세 자녀를 데리고 남편과 함께 촛불광장에 나갔다. 살면서 한번도 집회나 시위에 참여해 본 적이 없던 그는 미국산 소고기 수입으로 촛불의 격랑이 일었던 2008년에도 “한우 사먹으면 되지” 생각했던 정치 무관심층이었다. 당시 주변에는 갓난아기를 데리고 택시 타고 광장에 나갔던 엄마도 있었다. 하지만 그 자신은 “권력의 부조리를 보며 침묵만 했던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광우병 사태 때는 안 먹으면 된다는 옵션이라도 있었지만, 이 나라에는 대안이 없었어요. 대통령이 비선실세에 휘둘려 말도 안 되는 짓들을 하는데, 아이들 앞에서 침묵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더라고요. 촛불을 통해 국민들이 권력에 맞서 목소리를 내는 방법도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오씨는 미국산 소고기 반대 집회에 나갔던 엄마가 ‘사람들이 조금만 더 모여주면 바꿀 수 있을 것 같은데’라며 안타까워했던 게 그렇게 생각이 나더라고 했다. 처음으로 힘을 보태고, 목소리를 모으고, 말로만 듣던 연대를 실천해보고 싶어졌다.

“아이들을 데리고 사람들로 가득한 광장에 처음 섰는데, 내가 비로소 이 나라의 국민으로 느껴지더군요. 새 시대를 열겠다는 똑같은 희망을 갖고 공동체의 울타리 안에 함께 서 있다는 게 그렇게 감격적일 수가 없었어요. 그 전까지 저는 그저 개인일 뿐이었죠. 아, 나는 공동체의 연대를 위해 아무것도 한 게 없구나 부끄러웠어요.” 오씨는 “그저 내 아이들만 잘 키우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더라”며 “내 아이가 잘 되려면 마을이 건강해야 하고, 그러려면 나라 전체가 건강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이런 각성은 자연스레 정치에 대한 관심 고조로 이어졌다. 오씨는 특히 공론화위원회를 통한 숙의민주주의 실험을 뿌듯하게 지켜보고 있다고. “나의 미약한 촛불이 계기가 돼 보다 성숙한 민주주의가 실현되고 있는 거잖아요. 내가 큰일을 했구나 자부심을 느껴요.”

촛불 이후 지역구 국회의원에게 정치적 견해를 전달하기 위해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정도는 흔한 일이 됐다고 오숙희씨는 말한다. 투표 후 누굴 뽑았더라 기억도 가물거렸던 과거는 지났다. “나는 주권자고, 당신은 대리인이라는 걸 이제는 다 알아요. 정치인은 우리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라는 걸요. 대통령도 바꿔봤는데 지역구 의원에게 문자 보내는 정도야 어려운 일이 아니죠.” 뽑히고 나면 그만이던 국회의원도 이젠 주민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는 게 느껴진다. 촛불의 보람이다.

촛불은 한국 주권자들의 유전자에 정치 효능감을 아로새겼다. ‘나는 주권자고, 당신은 대리인이다.’ 최대 인파가 운집한 지난해 12월 3일 광화문에서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며 청와대를 향해 행진하고 있는 촛불 시민들의 행렬. 한국일보 자료사진
촛불은 한국 주권자들의 유전자에 정치 효능감을 아로새겼다. ‘나는 주권자고, 당신은 대리인이다.’ 최대 인파가 운집한 지난해 12월 3일 광화문에서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며 청와대를 향해 행진하고 있는 촛불 시민들의 행렬. 한국일보 자료사진

거대한 민주주의의 학습장, 그곳에서 배운 것들

박근혜 전 대통령과 그 비선실세 최순실씨의 국정농단으로 촉발된 촛불집회가 29일로 1주년을 맞는다. 붕괴된 민주주의의 근간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가을부터 봄까지 세 계절 동안 열린 총 23회의 토요집회에 연인원 1,700만명의 시민이 모였고,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은 비폭력 시위로 평화적 정권교체라는 혁명적 기적을 이뤘다. 국민주권의 헌법정신을 죽어있던 사어(死語)에서 약동하는 진실로 변환한 촛불혁명은 시민의 유전자에 정치 효능감을 각인시켰다. 촛불 이후, 대한민국의 어느 누구도 이전과는 같은 사람이 아니다. 크든 작든, 촛불은 한국의 주권자들을 변화시켰다.

6세와 4세 아이를 키우는 직장인 백지현(33)씨는 촛불 이후 남편과 함께 한 정당의 권리당원으로 가입했다. 본격적인 정치 참여와 감시를 위해서다. “우리 애기들은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엄청난 힘과 지위를 가진 자리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런 사람도 잘못하면 국민이 끌어내려 큰 벌을 줄 수 있다는 것도 이제 알게 됐죠.” 백씨는 촛불 이전까지는 한번도 집회에 나가본 적 없고, 정치 스캔들을 볼 때면 ‘또 저러는구나’ 생각하고 마는 평범하고 조용한 사람이었다. “이제는 제대로 교육받고 도덕관념 제대로 박힌 사람들이 정치를 해야 해요. ‘나 하나가 무슨 힘이 있겠어’가 아니라 ‘나 하나의 힘이 엄청나게 크다’는 것을 절감했잖아요.” 백씨 같은 젊은 세대에게는 승리해 본 경험이 없다는 것이 정치 냉소와 무력감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 ‘해봤자 되겠어’에서 ‘해보니 되더라’로 경험의 감각회로가 변경됐으니 정치에 대해 보다 적극적인 생각을 갖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외환위기 당시 은행산업 구조조정에 맞서 집회현장에 나간 이후 처음으로 촛불집회에 참여했던 박재성(가명ㆍ54ㆍ금융업)씨는 폭력적이었던 과거 집회와 달리 질서정연하고 성숙한 시민의식에 감탄하며 새로이 민주주의를 배웠다. 전교조 출신 학원 강사인 386세대 김송환(54)씨도 “광장에 긴장감이 없다는 게 너무나 신기했다”고 했다. “미완의 혁명으로 끝난 4ㆍ19와 달리 탄탄한 정권을 만들어냈잖아요. 아래로부터의 혁명이라는 이 경험이 한국사회가 발전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될 거라고 믿습니다.”

광장에서 우리는 혼자가 아니었다

광장에서 우리는 서로를 믿고 있었다. ‘나’는 섬이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우리는 연결되어 대륙이 되었다. 대학병원 간호사인 김혜란(44)씨는 “국가가 있는가” 묻기 위해 광장에 나갔다가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구나”를 배우고 왔다. “진실은 반드시 승리한다. 다만 시간이 걸릴 뿐이다”라는 생각은 김씨를 결코 촛불 이전으로 돌아가게 하지 못한다. “그러나 진실은 스스로, 쉽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밝히기 위한 지난한 과정이 필수적이죠. 그 과정에 내가 기꺼이 동참하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면서 촛불로 인해 내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깨닫곤 해요.”

지난해 수능을 치르자마자 고향 삼척에서 광화문 촛불광장으로 달려나갔던 김오연(19ㆍ가톨릭관동대 사회복지학과)씨는 “기득권자들은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을 무서워한다는 것을 절감했다”며 “많은 사람들이 함께 내디딘 한 걸음으로 정권이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함께의 위력’을 느꼈다”고 했다. 시각장애인 아들을 키우는 김혜란(50ㆍ주부)씨는 “같이 사는 동시대 시민들에 대한 믿음이 좀 생겼다”며 “우리는 우중이 아니라 현중일 수 있겠구나 깨달았다”고 말했다.

이화여대 노동자연대에서 활동 중인 양효영(25ㆍ정치외교학과 재학)씨는 세월호 생존학생들이 광장 자유발언대에 올랐을 때 통곡하듯 울었다. 100만 군중 앞에서 ‘우리들이 살아남아 끝까지 싸우겠다’고 담담하게 말하는 어린 친구들을 차마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 큰 슬픔을 함께 이겨내려는 광장의 풍경이 그렇게 뭉클할 수 없었다. 세월호의 아이들을 등에 태운 파란 고래 풍선이 하늘로 날아오를 때, 광장의 누군들 울음을 참을 수 있었던가.

“촛불 이후 정치적 문제에 관심이 높아진 학생들의 변화를 피부로 느껴요. 올 여름 학교 청소노동자들의 파업에 연대 서명을 제안했는데, 사흘 만에 700명이 서명을 해서 깜짝 놀랐어요. 학교도 진보적인 주제를 다루는 토론회에는 대체로 장소를 잘 안 빌려주거든요. 그런데 최근 촛불집회 토론회에는 아무 말 없이 대관을 해주더라고요. 큰 변화를 느꼈어요.”

박근혜 대통령 퇴진촉구 촛불집회가 열린 지난해 11월 26일 서울 종로구 청운동주민센터 앞에서 시민들이 세월호 아이들을 태운 파란 고래 풍선을 옮기고 있다. 연합뉴스
박근혜 대통령 퇴진촉구 촛불집회가 열린 지난해 11월 26일 서울 종로구 청운동주민센터 앞에서 시민들이 세월호 아이들을 태운 파란 고래 풍선을 옮기고 있다. 연합뉴스

한국사회의 정치적 우울, 그 치유의 공간

촛불혁명은 최순실 국정농단만으로 발발하지 않았다. 이 비극서사의 후반부가 국정농단이라면, 그 전반부는 세월호였다. 분노의 임계점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사건들이 있었지만, 가장 큰 동력을 비축케 한 건 세월호의 참혹이었다.

서울 망원동에서 비온뒤숲속약국을 운영하는 장영옥(57)씨는 세월호 이전까지 “나 개인의 평화와 행복, 성장이 주요 관심사였던 사람”이다. 사회적 문제들은 전문가들이 알아서 잘 해결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시민으로서 법 잘 지키고 세금 잘 내며 양심적으로 살면 그만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세월호와 맞닥뜨리면서 그 믿음은 산산이 부서졌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권력을 쥔 이들에게 힘을 보태는 것이라는 자각을 처음으로 갖게 됐어요. 정치가 개인의 삶에 얼마나 깊숙이 침투해 있는지 절감한 거죠. 세월호가 잠자는 저를 깨웠달까요. 이런 비극이 생겨난 사회에서 나 하나의 안위만 생각하고 산다는 것 자체가 죄악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죠.”

장씨는 첫 번째 촛불집회부터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인용 결정이 났던 올 3월 10일 집회까지 꼬박 스무 번의 주말을 광장에서 보냈다. 그렇게 잊지 말자던 세월호를 그렇게 빠르게 잊어버린 사회에 무력하게 분노했던 상처를 이곳에서 치유받았다. “이렇게 끝나가는 건가 싶었는데, 결국은 다시 일어섰잖아요. 그야말로 바람보다 빨리 눕고 바람보다 빨리 일어나는 풀의 힘을 서로가 느낀 거죠. 권력에 대한 절망뿐 아니라 우리에 대한 절망까지도 그렇게 치유받지 않았을까요.”

장씨의 약국은 촛불 이후 최저임금 1만원제를 자체 시행하고 있다. 헬조선으로 불리던 이 공동체에 어떻게 하면 작은 희망의 씨앗이라도 뿌릴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올 6월부터 약국 직원들에게 시급 1만원을 지급하기 시작했다. 개인의 삶 속에서 촛불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노력이다.

건설업에 종사하는 박주명(44)씨에게도 촛불혁명의 시점은 세월호였다. “대통령이 국민을 핫바지로, 개돼지로 보고 있다는 생각”에 처음으로 광장에 나오기 시작했다. “국가가 모든 사고와 재앙을 다 막을 수는 없겠죠. 하지만 최선을 다해 구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고 뻔뻔하게 거짓말을 일삼았어요. 거기다 국정농단까지, 배움의 정도를 떠나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가 그냥 있기 너무 답답하니까 뛰쳐나온 것 아닙니까. 제가 윤봉길 의사처럼 도시락 폭탄을 던져 애국할 정도는 아니지만, 이게 아니다, 세상 살아가는 게 이게 아니다, 이런 억울함과 분노는 억누를 수가 없었어요.”

박씨의 촛불 이후는 ‘내 안의 박근혜 몰아내기’로 요약된다. “내가 민주주의자가 아니면서, 내가 박근혜처럼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서 촛불을 운운하면 우습잖아요. 촛불을 겪었으니까 저는 떳떳하고 싶습니다. 제 자식들에게도 이번 주에 레고를 사주겠다 약속했으면 지켜야 하는 거예요.”

시인 송경동(50)씨는 “온 국민이 상주였던 세월호로 인해 쌓였던 분노가 터져나온 것”이라며 “이명박ㆍ박근혜 정권에 짓밟힌 민주주의 현장, 민생 현장에서 축적됐던 그 많은 고통의 시간들, 분노의 시간들이 한번쯤은 맑게 정화되는 순간”이었다고 말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된 다음날인 지난해 12월 10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한 어린이가 촛불을 밝히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된 다음날인 지난해 12월 10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한 어린이가 촛불을 밝히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아이 캔 스피크’, ‘위 캔 리슨’

촛불광장에 마련된 자유발언대는 추상적 개념이던 공론장을 살아 펄떡이는 실재로 눈앞에 재현했다. 시민들은 그곳에서 ‘나는 말할 수 있고, 우리는 들을 수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행하고 느꼈다. 대기업 부장 김수찬(가명ㆍ45)씨는 자유발언대 덕분에 촛불은 배려라는 걸 배웠다. 자신의 권리와 다양성을 주장하는 게 민주주의고, 이때 가장 필요한 게 남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고 배려하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초등학생부터 노인까지, 성소수자부터 청소노동자까지 따뜻하게 서로가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던 시간. 스물 세 번의 토요일을 통해 한국사회는 이곳이 함께 사는 세상임을 새삼스레 학습했다. 이 땅에 희망이 있었구나, 모두가 놀랍게 깨달았던 곳. 광장에서 보낸 날들은 고스란히 공동체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는 시간들이었다.

1급 중증장애인 최용기(51)씨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활동가로 광장에서의 삶이 익숙하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배제 당하지 않고 공감 받았던 것은 촛불광장이 처음이었다. 장애인 차별금지나 이동권 문제를 얘기하면 대체로 ‘내 문제는 아니야’라는 반응을 보이던 비장애인들이 촛불광장에서는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마치 자기 문제인 것처럼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장애인들이 기습 방문을 하거나 기자회견을 하러 가면 뒷문으로 도망 다니기 바빴던 장관들이 촛불 이후에는 시간을 내 대화를 하고 질문을 받는다. “이제는 정치인들이 우리를 대화의 파트너로 생각하는 것 같아요. 촛불이 가져온 변화죠. 정부의 포용력이 달라진 것뿐 아직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어요. 하지만 세상이 변할 것 같은 기대와 희망은 갖게 됐지요.”

모든 목소리가 환대 받았던 것은 아니다. 촛불광장의 중요한 한 축이었던 페미니스트들의 목소리에 광장은 때때로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페미당당 활동가인 우지안(23)씨는 “혐오발언 없는 시위문화를 만들자고 했을 때 내부 동력을 떨어뜨린다고 비판한다면 그 동력은 소수자를 배제하고 얻는 것”이라며 “그렇게 얻은 정의는 누구의 정의인가 하는 문제의식이 있었다”고 말했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요구하는 움직임에 최근에는 ‘촛불도둑’이라는 표현까지 나왔다.

하지만 희망은 보인다. “2008년만 해도 ‘콘돌리자 라이스를 강간하자’ 같은 구호가 전혀 문제의식 없이 사용됐잖아요. 자정의 목소리가 나오고 그 목소리가 수용되기도 하는 걸 보며 아, 많이 바뀌긴 했구나 느껴요.” 우씨는 촛불이 가져다 준 변화로 여성으로서 자신감과 자존감을 갖게 됐다는 점을 꼽았다. “페미존 깃발 뒤에서 행진하는데, 내 인생에서 ‘내가 여기에 소속돼 있구나’하는 감정을 느낀 건 처음이었어요. 많은 소수자들이 ‘나는 트랜스젠더인데…’, ‘나는 청소년인데…’ ‘나는 성소수자인데…’라고 발언하고, ‘발언을 할 수 있어 너무 좋다, 여기가 내 자리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얘기하는 걸 보는 게 정말 소중한 경험이었요.” 공론장에 서 본 경험, 나의 이야기를 하고 그것에 귀 기울이는 사람들과 접속하는 경이. 그 겨울의 광장에선 그것이 가능했다.

촛불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누구도 촛불을 과거완료형으로 서술하지 않는다. 갈 길은 멀고, 이제 시작일 뿐이라고 모두가 입을 모은다. “촛불을 통해 배우고 느낀 교훈과 감동이 한때의 추억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힘이라는 것. 그 기억을 가지고 각자의 삶 속에서 촛불정신을 만들어 가야 하는 것 아닐까요.” 김선경(34) 청년민중당 부대표는 “정치에 대한 혐오가 비관, 방관으로 이어졌지만, 우리가 바로 변화를 만든 주체”라며 “정치권이 해결해 주겠지 생각만 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나설 때 비로소 정치가, 사회가, 세상이 바뀐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송경동 시인은 “1차 촛불항쟁이 박근혜 전 대통령의 파면을 만들어냈다면, 2차 촛불항쟁은 현재 진행 중”이라고 말한다. “문재인 정부는 촛불항쟁의 대리정부입니다. 촛불이 새로운 정치적 시공간을 열었고, 거기에 촛불 시민정부가 들어선 거죠. 이 정부가 한국사회에 제기되는 과제들을 어떻게 수행해 주느냐, 잘 지켜봐야 합니다.”

주부 신아루(35)씨는 삼베옷을 입은 장정들이 청와대 영정사진을 든 채 상여를 메고 촛불광장에서 결연히 걸어가던 침묵의 행렬을 잊지 못한다. 서슬 퍼런 눈빛에 담긴 주권자의 힘에 압도됐다. “예전엔 누가 억울한 일을 당해도 해결할 힘도, 돈도 없다는 것만 뼈저리게 느끼며 하루하루를 살았죠. 촛불집회도 처음엔 저런다고 뭐가 바뀌나 생각했어요. 하지만 촛불에 힘을 보태고 난 후엔 어쩌면 세상이 바뀔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아침마다 눈뜨는 게 조금씩 설레기까지 해요. 잘못한 사람은 아무리 돈과 힘이 있어도 벌을 받고, 그게 당연한 일이 되는 나라가 어쩌면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 때문에요.”

촛불, 1년. 한국 정치는 촛불이 열어젖힌 새로운 시공간에 과연 얼마나 적응했는가. 개벽하듯 진화한 주권자의 기대와 열망에 얼마나 부응하고 있는가.

박선영 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곽주현 기자 zooh@hankookilbo.com

박재현 기자 remak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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