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0월 27일 프랑스 무슬림 이민자들의 대규모 폭동이 시작됐다. 해묵은 집단 갈등이 비극적으로 표출된 신호탄이었다. AP 자료사진

프랑스 파리 서쪽 센생드니주 클리시수브아(Clichy sous-Bois)는 전형적인 ‘방리유(Banlieue)’ 즉 변두리 빈민가로, 한 편에서는 범죄의 온상으로 다른 편에서는 소외된 삶의 공간으로 불리는 곳이다. 2005년 10월 27일, 거기서 20세기 프랑스의 가장 격렬한 시위ㆍ폭동이 시작됐다. 주민 대다수가 알제리 모로코 튀니지 등 북아프리카와 시리아 레바논 등 중동지역 이민자 및 2, 3세들이었다.

그날 오후 5시 20분, 한 건설 현장에 도둑이 들었다는 신고를 받고 경찰이 출동했다. 축구를 하고 놀다가 귀가하던 마을 10대 소년들이 순찰차를 보고 도망을 친 게 화근이라면 화근이었다. 용의자로 판단한 경찰은 그들을 추적, 현장에서 6명을 체포했다. 인근 변전소 담장을 넘어 도주했던 17세 지예드(Zyed Benna)와 15세 부나(Bouna Traore)는 감전돼 숨졌고, 17세 무히틴(Muhittin Altun)은 중화상을 입었다. 무히틴은 경찰 불심검문에 걸려 귀찮은 일을 당하는 게 싫어 도주했을 뿐이라고 진술했다. 잘못이 있든 없든 예사로 서너 시간씩 경찰서에 잡혀 있어야 하고 부모가 불려오기도 했다고 한다.

다음날 저녁, 경위를 알게 된 주민들이 시위를 시작했다. 그날 하루 동안 27명이 체포됐다. 하지만 시위는 폭동으로 연일 확산됐다. 인근 몽페르메유(Monfermeilfh), 다음날은 센생드니주 전역으로, 디종, 루엔, 마르세유, 낭트, 니스로 파장은 확산됐다. 프랑스 정부는 11월 8일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고, 폭동은 11월 16일 파리로까지 번진 뒤 진압됐다. 그 기간 동안 약 9,000대의 차량이 불탔고, 2,888명이 체포됐다.

배경에는 경찰의 잦은 월권과 가혹행위가 있었다. 더 깊이 보면 80년대 이후 심화한 이민자 청년 실업과 방리유 주민들의 소외와 분노가 있었다. 19세기 제국 프랑스의 북아프리카 및 중동 식민지 경영과 알제리 독립 탄압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을 것이다. 2차대전 후 유럽 부흥기의 프랑스는 그들 이민자 노동력에 크게 의존했지만, 70년대 석유파동과 경기침체 이후 등 떠밀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죽음은 그 처지의 상징적 사건이었고, 폭동은 갈등이 비극적으로 표출되는 신호탄이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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