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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의 시 한 송이] 화살과 저녁

입력
2017.10.26 12:33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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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도 선택할 수 있는 것이지요. ‘실패했다’는 한 동안의 시간을 통째로 규정하는 방식이지요. 그에 반해 “모든 것에 실패하고 싶다”는 선언은 결과를 염려할 힘으로 먼저 화살을 쏘는 행위지요. ‘정중앙을 맞히고야 말겠다’는 실패할 확률이 높은 화살이지만 ‘실패하고 싶다’는 자유롭고 싶은 화살이지요. 과녁에 이르는 동안 쏜살의 기쁨을 느끼는 화살이지요.

모든 빛이 모든 어둠으로 바뀌는 저녁 또한 전면전의 선언이지요. 동그란 빛에 들어 자야 따뜻하고, 생각은 삼각형으로 예리해져야 그림자와 빛이 헤어지는 찰나를 포착할 수 있어요. 발끝으로 세상을 걸어 발가락이 가장 먼저 낡으면 예리한 화살이 될 수 있을까요? 과녁에 온 신경을 집중하는 화살이 되는 삶. 이쯤에 이르러 “나는 모든 것에 실패하고 싶다”고 선언했을 거예요. 평화의 비둘기를 날려 보내는 심정으로 자발적 항복을 선택했을 거예요.

그러고 나니 화관을 만들고 싶어졌어요. 나중에 죽은 사람들에게 씌어주고 싶은 화관은 민들레, 개암나무, 피자두로 만들고 싶어요. 그들은 나의 이름을 모를 테지만 나는 그들의 이름을 알고 있으니, 실패를 선택한 내가 만드는 이 화관은 구속의 시간을 벗어난 싱싱함이에요. 시공간의 확장이에요.

어둠이 깊은 계절이 시작되었어요. 날이 차가워지는 만큼 어둠도 선명하게 깊어지지요. 실과 실패의 관계처럼, 모이는 실패는, 다시 쏠 수 있는 화살인 동시에 화관을 만들 수 있는 주재료가 되지요. 잎과 꽃이 달린 부드러운 줄기가 없으면 화관을 만들 수 없으니까요.

이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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