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서로의 여정을 시작하며

※기민석 침례신학대 구약학 교수가 ‘기민석 교수의 성경 俗 이야기’ 연재를 선보인다. 영국 런던대 킹스칼리지 성서학을 거쳐, 맨체스터대에서 구약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기 교수의 고민은 2,000년 전에 만들어진 성경을 기독교인은 물론, 비기독교인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주어야 하는가다. 그런 고민을 바탕으로 쓴 글들 덕에 2010년 두란노서원 창립 30주년 문학상을 받았다.
알브레히트 뒤러의 1507년작 '아담과 이브'. 창조로 태어난 이들인데, 마치 어머니가 있었던 듯 배꼽이 선명하다. 뒤러는 창조론을 부정한 사악한 작가일까.

한여름 폭염에 한껏 달구어진 로마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더운 날씨였지만 바티칸 미술관에 들어가는 여자들은 맨살이 드러난 어깨와 가슴을 반드시 수건으로 가리고 입장해야 했다. 거긴 로마 가톨릭의 성역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들어가서 보니 참 역설적인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벽에 걸린 수많은 성화 속에서는 남자나 여자나 거의 벗고들 계셨기 때문이었다. 세속의 관람객들은 조신하게 몸을 가렸고, 그림의 성자들은 마음껏 벗고 계셨다.

그런데 미술관 밖에서는 또 다른 역설이 보였다. 한여름의 로마처럼 육욕이 넘실거리는 곳이 있을까? 벌건 태양 아래 그 곳의 젊은이들은 그야말로 로마의 열정을 과감하게 ‘노출’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화끈 발끈한 군중들 사이에는 온몸을 까만 천으로 두른 채 유유히 그 사이를 비집고 다니시는 성직자들도 있었다.

예수님은 포경수술을 받았을까

그 탓인지 작품을 감상하던 나도 그만 발칙한 역설에 엮였다. 성화(聖畵) 속에서 발가벗겨진 예수님의 민망한 곳이 자꾸 눈에 띄기 시작한 것이다. 많은 기독교 성화 속의 예수님은 포경수술을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유대인이시기 때문에 분명 할례(포경수술)를 받으셨을 텐데 말이다. 성경 누가복음 2장 21절도 그가 태어난 후 8일째에 할례를 받으신 것으로 말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성화들이 그려진 때는 유럽에 기독교가 흥왕했던 시기였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하여, 그리고 사회 경제적 요인으로 인한 반-유대 정서로 인하여 당시 유럽인들은 유대인을 썩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예수님은 비록 유대인이셨지만 유대인처럼 할례를 받으신 것으로 묘사하기 싫었던 모양이다. 예수님을 그렇게까지 발가벗겨 버린 것에 대해 나는 유감이 앞섰지만, 당시 사람들에겐 그 문제보다는 종교적 사회적 이데올로기가 더 예민했던 문제였나 보다.

성과 속으로 떠나는 여행

참, 제 소개가 늦었다. 앞으로 이 지면을 통해 여러분들을 성서의 세계로 모실 여행 가이드다. 특히 여행지의 ‘뒷골목’을 탐방하고자 한다. 뒷골목을 돌아보지 않으면 그건 방문이지 여행이라 할 수 없다. 보여 주려고 하는 것만 보면 진짜 생 얼굴은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서와 관련하여 고대 이스라엘과 중동, 기독교와 유대교, 원시 사회와 현대 사회의 이모저모를 들여다볼 참이다. 위에 소개한 로마의 경험은 앞으로 다녀 볼 성서 세계의 감상과도 상통하는 것이 있을 것이다. 닿지 않을, 먼 곳에 있는 것 같지만 바로 우리들과 살을 비비고 있는 것이 ‘성(聖)과 속(俗)’이다. 성서는 신의 말씀이라 여겨지기도 하지만 동시에 아주 적나라한, 고대 이스라엘의 살 냄새 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벌거벗으신 예수님까지 보았으니 거의 귀여운 수준의 관찰 하나만 더 해 보자. 엉뚱한 말 같지만 성경이 말하는 역사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이브는 배꼽이 있었을까? 사람이 엄마 배 속에 있을 때 배에 연결된 탯줄을 가지고 있었기에 생긴 것이 배꼽이다. 그런데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이 흙으로 빚어서 만드신, 일종의 무성생식으로 나신 분들이다. 배꼽이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바티칸 미술관의 성화도, 인터넷을 통해 찾아본 여러 그림에도 두 분은 늘 예쁜 배꼽 하나씩 가지고 계셨다. 하나님 입장에서도 창조하실 적에 일부러라도 인위적인 배꼽을 아담과 이브 배에 콕 찍어 놓지 않으셨을까? 미관상의 이유 때문이다. 배꼽이 없는 여러분들의 배를 상상해 보시기 바란다.

성경은 무오류 백과사전이 아니다

이 뿐만이 아니라 신앙인이든 아니든, 성경을 접하고 이 생각 저 생각 하다 보면 궁금한 것이 바벨탑처럼 높아간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그 하루는 24시간이었을까? 에덴동산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이브와 대화를 나눈 뱀은 어떤 구강 구조를 가졌을까? 어머니 혼자 잉태하여 태어난 예수님은, 그렇다면 아버지 요셉과는 전혀 닮지 않았을까? 무궁한 궁금증이 발생한다. 그래서 이 성서 여정을 떠나기 전에 꼭 알아야 할 주의 사항이 몇 가지 있다.

먼저, 성경은 절대 백과사전이 아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을 알려주는 책이지 우리가 알고 싶어 하는 것을 대답해 주는 책이 아니다. 우리가 꼭 알아야 한다고 성경이 제시하는 것은 다름 아닌 “어떻게 하면 사람을 구할 수 있을까?”이다. 이 초점과 깊이 관계하지 않는 것은 영원히 궁금한 것으로 남겨질 수도 있다. 사람을 구원(救援)으로 이끌 수만 있다면 나머지는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지구 역사 6,000년? 성경과 무관하다

얼마 전 공직 인사 청문회에서 어떤 분이 지구의 역사를 6,000년으로 믿는다고 해서 화제가 된 일이 있었다. 성경은 지구의 나이를 밝히는 것에 전혀 관심도 없을뿐더러, 뚜렷이 밝히지도 않는다. 6,000년이든 6억년이든 성경을 통해 제 나름의 추측을 내놓을 수는 있겠지만, 그 추측을 하나의 신념으로 받아들인다면 이는 적절치 못한 성경 읽기의 결과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성경을 통해 ‘건강한 다이어트 법’을 고안하여 제시하기도 하지만, 마찬가지로 이는 성경의 초점과는 거리가 있다. 성경의 애매모호한 것은 애매모호하게 두어야 하는 것이 옳다. 그것이 성경의 저작의도를 존중하는 것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성경이 분명하고 쉽게 전달하여준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초등학생도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성경은 열렬한 고백이다

다음, 성경은 역사서도 과학서도 아니라 ‘신앙 고백서’다. 무엇을 읽든 그 장르부터 잘 파악해야 한다. 어느 시인이 “나는 한 마리 작은 새”라고 말했다고 해서, 의사 선생님이 정신병 진단을 내린다면 웃지도 못 할 우스운 일이 된다. 성경의 창세기는 빅뱅이론이나 창조이론 같은 것을 입증하기 위해 쓰여진 과학 논문이 아니다. 성경은 우주의 기원과 질서의 주관자가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신앙 고백을 하는 책이다. 열왕기서에 나온 수많은 왕들에 대한 기록은 국가정보원에 보관되어 있는 전직 대통령의 대화록과 같은 것이 아니다. 왕들의 이야기를 통해 신앙의 교훈을 전달하고자 적은 신앙 교훈서인 것이다.

성경은 행동을 촉구한다

그리고 성경은 아는 것보다는 행하는 것을 강조한다. 그래서 ‘듣고’라는 말 다음에 성경이 누누이 강조하는 말은 ‘행하라’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가복음에서 이렇게까지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6장 46-49절). 성경은 깨달음의 즐거움을 누리라고 적혀진 게 아니다. 성경이 간절히 바라는 바는 깨달았다면 그 다음에는 행동으로 옮기는 역동성과 변화가 삶에 일어나라는 것이다.

자, 이 세 가지가 우리 여행의 안전 수칙이다. 잘 기억해 두시면 우리가 어떤 여정을 가더라도 길을 잃지 않고 성경이 제공하는 진수성찬 같은 여행을 즐기실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말인데, 만약 누군가가 아담과 이브는 무성생식으로 만들어진 존재이기 때문에 절대 배꼽이 있어서는 안 되며, 수많은 성화 속에 드러난 아담과 이브의 배꼽은 모두 다 검은 칠을 하여 없애 버려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면, 그 사람은 좀 얄미운 사람이다. 나의 여행 주의 사항도 어겼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미적 감각도 폄하하였기 때문이다. 아담과 이브의 배꼽은 그야말로 신의 한 수였을 수도!

기민석 침례신학대 구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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