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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우리 어머니들의 파이

입력
2017.10.12 19:0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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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3일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린 '금융권 공동 채용박람회'를 찾은 청년들이 현장면접을 보고 있다. 배우한 기자
지난달 13일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린 '금융권 공동 채용박람회'를 찾은 청년들이 현장면접을 보고 있다. 배우한 기자

“열악한 상황에 있는 젊은 (남성)청년세대들이 여성이 자기들의 파이를 빼앗아 간다고 생각하는데, 오해다.” “남성이 7개, 여성이 3개를 갖고 있는 파이를 남성의 몫을 빼앗아 5개, 5개로 만들자는 것이 아니며, 성평등 의식 확산을 통해서 파이를 13, 14개로 늘려갈 수 있다.” 최근 정현백 여성가족부 장관과의 인터뷰 자리에서 들은 말이다.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상대적 약자 편에서 어떤 요구나 의견을 이야기 할 때면, 옳고 그르냐보다 기득권(주류)이 가진 이익을 침해하느냐에 초점이 맞춰지는 것 같다. ‘장애인 아이들이 다니는 특수학교를 지어도 주변 집값이 떨어지지 않아요’가 그것이다. 슬프지만 “우리가 (당신이 가진 게 정당하건 아니건) 뺏으려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 예쁘게 봐주세요”라는 굴복의 함의가 들어있다. 물론 영리한, 그리고 필요한 전략이다. 기득권과 대립할 때의 피로, 티끌까지 끌어 모아야 하는 용기를 ‘당신에게도 이익입니다(혹은 손해가 아닙니다)’는 한 마디로 대체할 수 있다면야.

나도 몇 년 전 ‘성평등은 남성에게도 이익’이라는 취지의 한 외국칼럼(남성이 썼다)을 읽었을 때 안도감이 들었다. 여성 참정권이 부여된 후 정치인들이 여성 기호에 맞춘 정책을 내놓으면서 영아 사망률이 크게 줄었고, 때문에 많은 남성의 생명도 살렸다는 내용이 있었다. 또한 ‘우리 회사 사장은 여자야’라고 비꼬는 남성들 중 그 사장 때문에 잘리지 않은 경우가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는 지적도 있었다. 여성 경영자는 문제가 발생했을 때 해고로 풀려는 경향이 덜하다는 연구결과를 인용했다. 미국 사회학자 마이클 키멜 등에 따르면, 성평등 회사일수록 직업 만족도가 높고 생산성이 높다. 남성이 가정일ㆍ양육을 분담할 때 자녀의 학교 결석률이 낮고 성취도는 높으며, 주의력결핍장애(ADHD) 진단 가능성이 낮다.

국내 페미니즘 진영에서는 성평등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병역문제 해법으로 여성 징병제를 지지하는 목소리도 낸다.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양현아 교수는 “병역의무를 남성만 지게 한 것은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한 신체를 가졌다는 통념상의 ‘성차(性差)이론’에 입각한 성차별”이라며 “여성으로 병역법을 확대한다면 군 복무기간도 줄일 수 있고 사회복무제 등 다양한 군복무 대체방식 논의도 활발해진다”고 주장한 바 있다. 권인숙 한국여성정책연구원장도 여성의 병역 참여 지지를 밝힌 적이 있다.

나도 일자리 나누기와 청년실업 해법으로 남ㆍ녀 각 1년씩의 육아휴직 의무화를 생각해본 적이 있다. 아이가 만10세 이하일 때 쓰도록 사용가능 기한을 늘리면, 육아휴직이 한꺼번에 몰리는 현상을 완화해 충분히 현장에서 흡수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세부사항까지 설계해 보면서 말이다. 여성친화적 기업이란, 여성의 출산ㆍ육아휴직을 보장하는 기업이 아니라 남성도 똑같이 그 권리를 보장받고, 그로 인해 여성이 성별로 인해 눈치를 볼 필요가 없는 기업 아니겠는가. 그것을 이루기 위해 ‘일자리 나누기’라는 (이견 없는) 대의의 힘이라도 빌리고 싶은 건지 모른다.

하지만 TV 앞에 누워 차려주는 밥상만 받아먹는 가부장적인 남성에게, 육아휴직을 못쓰게 하고 실적을 높이려는 상사에게 성평등이 가져다 주는 사회적 이익은 자신의 이익이 아니다. 평소 여자는 출산과 육아휴직 때문에 탈락시켜야 한다는 지론을 가지고, 여성 지원자들의 면접점수를 조작해 탈락시켰다는 박기동 전 한국가스안전공사 사장의 사례는, 그런 미시 권력자의 상징이다.

미시권력의 자기장에서 성평등이 모두의 이익이 아니라 ‘누군가의 이익, 누군가의 손해’의 제로섬이라면 우리는 진짜 질문과 답을 해야 한다. ‘앵그리 화이트 맨’의 저자 키멜은 ‘흑인 여성이 내 직업을 빼앗아갔다’고 말하는 백인 남성들에게 ‘그것이 (애초) 왜 당신의 직업인가’를 되물었다. 여러 분야에서 절반을 점유해가는 여성들은 남성의 자리를 뺏는 것일까. 역으로 이전 세대까지 얼마나 많은 여성들의 재능과 능력이 박탈당했는지 그 억압의 증거로 보는 게 옳지 않나. 남성의 파이가 아니라, 제대로 경쟁했다면 우리 어머니들의 파이였다.

이진희 정책사회부 기자 rive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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