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이면 선물용으로 주고 받는 사과상자. 눈에 익은 친숙한 모양새지만, 과거엔 곱지 않은 오명도 썼습니다. 거액의 뇌물사건마다 사과상자가 자주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문민정부 출범 이후 금융실명제가 실시되면서 차명계좌를 이용하거나 고액수표를 주고 받기 어려워지자 사과상자나 라면상자가 ‘검은 돈’을 운반할 유용한 수단으로 등장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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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수서비리 사건으로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은 사과상자를 뇌물박스로 애용했던 대표적 기업인입니다. 5만원권이 나오기 전에 사과상자 1개에 1만원권을 가득 담으면 2억4,000만원까지 들어갔고, 이보다 적은 금액을 전달할 때는 1억2,000만원이 들어가는 라면상자가 활용됐습니다. 정태수 전 회장은 현금이 든 사과상자를 전달하면서 “아주 특별한 사과니까 잘 드시라”는 암시도 잊지 않았다고 합니다.

명절에 과일을 선물하는 건 미풍양속으로 여겨지니, 사과상자는 기업인들이 음지에서 뇌물을 전달해야 하는 수고를 덜어준 셈입니다. 아파트 현관 앞에서 과감하게 현금이 든 사과상자를 건네 받은 사람들도 있는 걸 보면, 당시 사과상자가 사람들의 의심을 피할 수 있는 유용한 도구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과일상자는 뇌물전달 도구뿐 아니라 비자금 보관용도로도 적합했던 모양입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자신의 비자금을 사과상자 25개에 담아 회사 창고에 보관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여기에 보관된 금액만 자그마치 61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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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과상자의 숨겨진 용도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사과상자는 점차 ‘뇌물상자’의 오명을 벗게 됩니다. 그 자리를 골프백이나 007가방, 굴비상자, 곶감상자가 ‘검은 돈’ 운반도구로 유명세를 타게 됩니다. 골프백에는 1만원권 2억원 정도, 굴비상자에는 1억원, 곶감상자에는 대략 2,000만원 정도가 들어간다고 합니다.

신권(新券)이 발행되면서 뇌물용기도 덩달아 진화합니다. 2009년 5만원권이 발행되자 이를 담을 용기도 몸집을 줄입니다. 사과상자처럼 눈에 확 띄는 상자를 이용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이지요. 대체품으로 크기가 작은 ‘비타민 음료상자’가 등장했습니다. 비타민 음료상자에 5만원권을 가득 채우면 8,000만원 정도 들어간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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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난해부터 시행된 ‘김영란법’의 영향으로 사과상자든 음료상자든 뇌물을 전달하는 행위 자체가 감소할 것으로 전망됩니다. 사과상자에는 사과만 담고, 굴비상자에는 굴비만 담는 투명한 세상이 오기를 기대합니다.

박지연 기자 jyp@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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