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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축구에서 발견한 뮤지컬의 현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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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축구에서 발견한 뮤지컬의 현주소

입력
2017.09.29 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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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축구 마니아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스포츠엔 큰 관심이 없지만 워낙 열정적으로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고개를 끄덕이며 오랫동안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한국 축구에 대해 나름의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 따르면 한국 축구는 개인 플레이가 강하다고 했다. 특히 공격수가 그렇다고 했다. 중앙에서 공을 앞으로 밀어주면 스트라이커가 혼자서 해결해야 한다는 거였다. 지금은 조직력이 많이 강화됐지만 스트라이커의 고독은 여전하다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그는 히딩크가 2002년에 주창한 멀티플레이라는 것도, K리그에서 한참 주가를 올리고 있다는 ‘닥공(닥치고 공격)’ 스타일도 결국은 조직력 강화가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공격수가 수비에 가담하고 전원 공격 시에 수비수가 공격을 지원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공격수가 수비에 가담하고 수비수가 공격에 녹아 들려면 전체적인 흐름을 꿰고 있어야 한다. 개인 전술과 함께 전체적인 전술에 몰입해야 하고, 이는 곧 조직력 강화의 결과로 나타난다.

그는 축구계보다 팬들의 수준이 더 높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축구를 헤집고 분석하는 시선이 이전보다 훨씬 깊어졌다는 거였다. 이를테면 과거에는 허공으로 슈팅을 쏘는 스트라이커에 대한 비난이 많았던 반면 요즘은 과정에 대해 이야기하는 팬이 많다고 했다. 올해 월드컵 예선에서 고전한 대표팀에 대해서도 “패스를 하면 공이 발에 착착 붙지 않고 퉁퉁 튕기는 느낌이 난다”는 말을 많이 한다고 했다. 패스가 매끄럽게 흘러가는지 살피는 것은 과정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과정이 자연스러우려면 조직력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었다.

“차범근을 보라구!”

차범근 감독 이야기가 나왔을 때 나는 귀를 쫑긋 세웠다. 나도 차범근 감독이 아시아에서 가장 우뚝한 축구 선수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는 차범근 감독이 월드컵에서 선수로 뛸 때도 가장 아쉬워했던 부분이 조직력이라고 말했다. 최근 인터뷰에서 다른 선수들과 손발을 맞춰볼 시간이 적어서 아쉬웠다고 한 것이 그 근거라고 했다. 맞는 말 같았다. 그 위대한 선수가 한 골도 득점하지 못했다니! 물론 상대방의 견제가 심했겠지만, 유럽에서 뛸 때도 앞을 가로막는 선수는 있었을 것 아닌가.

나는 축구 마니아의 말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내용이었다. 내가 그의 축구 이야기에 끝까지 귀를 기울이고 있었던 것도 그 기시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뮤지컬도 축구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스트라이커에게 너무 많은 기대와 짐을 지운다는 한국 축구의 시스템이 특히 뮤지컬과 빼닮았다. 이른바 ‘스타 시스템’이다. 관객들도 여기에 익숙해졌다. 뮤지컬 내용보다는 ‘누가 나오는지’에 더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축구로 치환해서 이야기하자면 감독이나 나머지 10명의 순서는 안중에도 없고 그저 스트라이커만 쳐다보는 식이다.

내가 월드컵 때 오프사이드나 기본적인 전술에 대한 지식도 없이 축구에 열광한 것처럼, 스타만 보고 극장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 스타의 매력도 뮤지컬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장점이다. 그러나 스타만 보고 찾는 건 문제가 있다. 뮤지컬은 원맨쇼가 아니고 연기자는 물론 조명팀과 소품팀, 음악팀의 막내까지 힘을 합쳐서 만들어가는 거대한 작품이다.

이야기를 꾸미는 연출, 극을 완성하기 위해 대사 한 마디 동작 하나까지 신경 쓰는 조연들의 노력이 스타가 비추는 광휘에 묻혀 존재감을 잃어버린다면 뮤지컬이 가진 거대한 감동을 온전히 전달하기 힘들다. 이야기 자체가 가진 힘보다 스타의 존재감으로 흥행이 결정되다 보니 흥행 내용이 빈약해지는 것이다. 결국 스타가 차지하는 공간이 너무 커서 뮤지컬 자체가 가벼워지는 형국이다. 스트라이커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알아서 해야 하는 ‘옛날’ 축구 스타일처럼.

'누가'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극을 통한 어떤 감동'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공연 예술은 학교의 교육만큼이나 중요한 영역이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는 아름다운 정서를 선물할 뿐 아니라 꿈과 희망을 선물할 수 있고 힘든 현실을 살아가는 일반인들에게는 쉼을 줄 수도 있다. 실제로 공연의 감동으로 인해 인생이 바뀐 사람들도 많이 있다. 보여줄 만한 작품은 많지만 ‘쓸 만한 스트라이커’를 구하지 못해 막을 올리기도 전에 무대를 접는 경우가 너무 자주 일어나고 있다. 올해만 해도 예정되었던 수많은 공연 제작이 기약 없이 중단됐다. 빚을 감당할 수 없게 된 몇몇 제작자들의 안타까운 사연이 들려왔다. 직간접적으로 연계된 이들이 많아 공연계 전체가 상실감에 시달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뮤지컬 본연의 감동 구조에 주목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멀티 플레이로 대변되는 조직력으로 기적을 일궈낸 2002 월드컵처럼, 뮤지컬도 주연뿐 아니라 좀 더 많은 요소들이 주목받는 시대가 열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대를 만드는 사람의 인내가 필요하다고 본다. 뮤지컬이 더 사랑받으려면, 더 멀리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당장의 결과에 급급해서는 안 된다. 뮤지컬 본연의 모습, 혹은 뮤지컬이 가진 진가를 더 적극적으로 양성하고 드러내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 같다.

홍본영 뮤지컬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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