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냐 등 판사ㆍ변호사 영국식 법복 고수
“법원 권위 상징” “식민지배의 유산” 맞서
가발 착용, 기후와 안 맞고 개당 6500달러
흰색 가발과 의복을 입은 영국 판사들 게티이미지뱅크

영국 식민지 경험이 있는 아프리카 각국에서 판사와 변호사가 흰색 가발과 붉은 영국식 법복을 착용하는 전통이 논란이 되고 있다. 흰색 가발이 법조인의 권위이자 전통을 상징한다고 주장하는 이들과 영국 식민통치의 그늘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젊은 법조인들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최근 미국 일간 워싱턴포스트(WP)는 케냐, 짐바브웨, 가나, 말라위 등 아프리카 여러 나라들이 영국에서 독립한 지 5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법정에서 판사와 변호사가 식민지배 산물인 흰색 가발과 영국식 의복을 착용하는 전통이 논란이 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가발 착용의 역사는 1600년대 유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역사학자들은 프랑스 루이 14세가 탈모를 감추기 위해 말총으로 만든 흰색 가발을 처음으로 착용했으며, 영국에선 찰스 2세 집권기부터 상류층에 가발이 유행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후 18세기가 되면서 흰색 가발은 판사와 변호사들은 다른 상류층과도 구분하는 위엄과 권위의 상징이 됐다.

문제는 아프리카 각국이 전통 보존이라는 명목으로 식민지배의 산물인 가발과 영국식 법복 착용을 50년 이상 계속하고 있다는 점. 아프리카는 흰색 가발에 대한 뼈아픈 기억을 갖고 있다. 1950년대 케냐에서는 반(反)백인 비밀 결사인 마우마우단이 독립을 모의하고 있다는 혐의로 기소돼 약 1,000명이 사형 선고를 받은 게 대표적이다. 이 때 선고를 한 판사들은 모두 흰색 가발과 붉은 의복을 착용하고 있었다. 국제법률가위원회(ICJ) 아프리카 대표 아널드 숭가는 “식민지 시절 사법부의 가발 착용 전통을 아직까지도 어떤 의구심 없이 유지하고 있다”며 “이런 전통은 수치스럽다”고 비판했다.

실제로 가발 착용은 아프리카 여건상 적합하지 않다. 나이지리아 변호사인 유니니 치오마는 “가발이 고안된 유럽의 기후는 우리와 매우 다르다”며 “가발을 착용하기에는 숨막히게 덥다”고 강조했다. 비용도 만만치 않다. 우간다 뉴비전 신문 조사에 따르면 가발 한 개의 제작 비용은 6,500달러에 이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발과 영국식 법복을 고수하는 사람들은 이 전통이 곧 사법부의 위엄을 높여 준다고 주장한다. 케냐 법학회 회장인 이삭 오크로는 “가발에 식민주의 전통이 내포됐다고 전혀 느끼지 않는다”고 말했다. 올해 케냐 수석재판관으로 취임한 데이비드 마라가는 취임식에서 흰색 가발과 붉은 의복을 입은 채 “식민지 시절 법정 전통으로 되돌아가길 원한다”고 밝혀 많은 케냐 국민들을 당혹케 했다.

물론 오랜 기간 법조계에 몸담은 판사들 모두가 가발 착용을 옹호하는 건 아니다. 전 케냐 수석재판관이었던 윌리 무퉁가는 흰색 가발을 법정에서 없앨 것을 호소하는 등 식민지 시대의 ‘인습’을 끊어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흰색 가발을 “끔찍한 것”이라고 불렀고, 붉은색 의복을 ‘케냐화’해서 노란색으로 바꿨다. 하지만 오랜 전통을 고수하려는 판사와 변호사 다수는 바뀐 의복을 착용하지 않고 있다.

박혜인 인턴기자(중앙대 정치국제학과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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