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할란 엘리슨, 성질머리와 재능

#1
가출, 퇴학, 싸움으로 점철된 인생
굴하지 않고 1,700여편 쏟아내
문학상만 60회… 최다 수상 작가
‘스타트렉’ 한편 쓰고 50년간 회자
#2
표절과 도용엔 단호히 법적 소송
‘터미네이터’ 원작자에 이름 올려
무시당하던 무명 작가 대거 발굴
소개한 작가들 줄줄이 거장으로
700여편의 ’스타트렉’ 에피소드 중 최고로 꼽히는 시즌1 제28편 '영원의 경계에 선 도시'는 미국작가조합상을 받은 유일한 ‘스타트렉’ 에피소드다. 그 작가가 단 한 편 ‘스타트렉’을 쓴 할란 엘리슨이다. 파라마운트

진 로덴베리가 1966년에 시작한 미국 SF 드라마 ‘스타트렉’은 지금까지 이어지며 TV로만 6종류, 30시즌, 726편 이상의 에피소드가 방영된, 문화현상에 가까운 작품이다. 이 방대한 에피소드 중 인기투표를 하면 늘 순위에 오르는 것은 물론 종종 1위로 손꼽히는 에피소드가 있다. 첫 시즌의 제28편, ‘영원의 경계에 선 도시(The City on the Edge of Forever)’(1967)이다. 등장인물의 개성, 유머, 로맨스, 아이러니, 반전과 결말까지 완벽한 이 작품은 휴고상, 미국작가조합상을 수상했고, 소설, 만화, 게임에 재수록되었고, 1995년 미국에서 조사한 ‘TV 역사상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 68위에 올랐다. 5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회자되며 재작년에는 만화화 되었고 작년 세계SF대회에서도 다시 언급되어 토론회가 열렸다. 이 에피소드의 원안자가 바로 할란 엘리슨®(자기 이름을 상표로 등록해 놓았다)이다.

아, 그러면 할란 엘리슨이 쓴 무수한 걸작 ‘스타트렉’ 에피소드가 있겠구나, 생각하고 찾으려 든다면 포기하는 것이 좋다. 엘리슨은 이 한 편의 대본을 쓰다가 로덴베리가 자기 초안을 바꾼다며 싸우다가 완전히 갈라서 버렸으니까. 그의 초안은 따로 각본상을 받았다. 더해서 엘리슨은 후에 ‘스타트렉’ 극장판 각본을 제안 받았지만, 제작자가 공룡시대가 배경인 이야기에 마야문명이 나오게 해달라고 하자 “작가는 나야, 내가 너 같은 병신 따위 알게 뭐야!”하고 뛰쳐나와 다시는 돌아가지 않았다.

전설적인 성질머리의 전설적인 작가

엘리슨의 ‘뛰쳐나오기’는 집과 학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십대에 집을 뛰쳐나와 온갖 허드렛일을 하며 살았고, 오하이오대에서는 18개월 만에 퇴학당했는데 일설에 의하면 교수가 자기에게 글의 재능이 없다고 했다는 이유로 교수를 팼기 때문이라고 한다(그리고 두 해만에 100여 편의 단편을 쏟아낸 뒤 20년간 출간할 때마다 그 교수에게 꼬박꼬박 책을 보내는 경이로운 뒤끝을 자랑했다). 디즈니에도 고용되었다가 하루 만에 해고되었는데, 디즈니 작품으로 포르노를 만들자는 농담을 하다가 들켰기 때문이라고 한다.

작가로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자 엘리슨은 뛰쳐나오는 데에 그치지 않고 본격적인 전쟁을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훔쳤다 싶은 이들에게 지치지 않고 소송을 걸었다.

그는 ‘로보캅’의 전신이라 할 만한 ABC TV 시리즈 ‘미래 경찰(Future Cop)’(1977)에 표절소송을 걸어 승소했고, 받은 돈 중 일부를 투자해 파라마운트 스튜디오 길 건너편 광고판에 “할란 엘리슨을 찬양하라! 작가들이여, 놈들이 아이디어를 훔치게 놔두지 마라!”라는 게시물을 떡하니 걸어놓았다. 2000년에는 자신의 작품을 불법 게시한 사람들을 고소하면서 관리 부실의 책임을 물어 무려 AOL을 비롯한 미 온라인 회사들을 직접 고소했다. 그래도 되는지 어쩐지 모르겠지만 AOL은 결국 4년 뒤 항복하고 돈을 지불했다.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전설적인 영화 ‘터미네이터’(1984)의 원작자 이름에 할란 엘리슨이 올라가 있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엘리슨은 이 영화가 그의 ‘아우터 리미트(Outer Limits)’(1974) TV시리즈 중 ‘병사들(Soldier)’과, ‘유리손을 가진 악마’와 유사하다고 소송을 걸었다. 미래 세계에서 병사가 번개와 함께 도시의 골목으로 시간여행을 하는 연출은 ‘병사들’과, 로봇이 자신의 기계팔을 내려다보는 장면은 ‘유리 손을 가진 악마’와 유사하다. 사실 ‘터미네이터’의 절대악 인공지능(AI) ‘스카이넷’은 엘리슨의 또 다른 문제작 ‘나는 입이 없다 그리고 나는 비명을 질러야 한다’에 등장하는, 인간에 대한 증오를 내뿜는 절대악 AI인 ‘AM’을 닮기도 했다.

하지만 실상 카메론은 무수한 SF의 세례를 받았을 것이고 할란 엘리슨의 작품도 마찬가지로 좋아했다고 한다. 실제로 영향을 받았는지, 아니면 우연에 의한 유사성인지는 여전히 논쟁이 되고 있지만, 어쨌든 제작사는 항복했고 엘리슨은 ‘터미네이터’의 원작자에 당당히 이름을 올려놓았다.

할란 엘리슨은 영화 ‘터미네이터’에서 미래의 병사가 도시 골목으로 시간여행을 오는 대목이 자기 작품의 아이디어라고 주장해 원작자에 이름을 올렸다. 엘리슨은 영화사, 온라인 업체 등을 상대로 지치지 않고 저작권 소송을 벌인 전사였다. 오리온픽처스 제공
주목받지 못했던 작가들을 발굴하다

당연히, 엘리슨의 명성은 그의 경이로운 성질에 있지 않으며, 그가 쏟아낸 막대한 양의 탁월한 작품들에 있다. 그는 1,700편 이상의 중단편 소설, 각본, 만화 대본, 에세이, 비평선을 썼다. 영화 ‘오스카’의 대본을 썼고 ‘아우터 리미트’를 포함한 수많은 TV시리즈를 집필했다. 문학상만 60여회를 수상해 실상 살아있는 작가들 중 가장 상을 많이 탄 사람에 속한다. 작품이 작가를 뛰어넘을 수 없다는 이론을 생각하면, 믿을 수 없는 고난에 빠지는 그의 주인공들이나 웃음이 나올 정도로 심술궂은 전개, 상상을 뛰어넘는 충격적인 결말은 어쩌면 그의 성질머리를 빼고는 설명이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한편으로 그는 교사와 편집자로서의 안목도 뛰어나, 당시의 SF 주류와 달라 주목받지 못했던 작가들을 무수히 발굴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체제에 반항적이었던 그의 성향이 “주류가 무시하는” 작가들의 존재를 참을 수 없었던 것일까. 최초의 흑인 여성 SF작가인 옥타비아 버틀러를 발굴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인종갈등이 첨예했던 1970년, 그는 주위의 시선에 아랑곳없이 문학수업을 전혀 받지 않은 이 흑인여자의 재능을 발견하고 창작 워크숍에 추천하며 작가가 되도록 격려했다. 다양한 문학상을 거머쥔 ‘히페리온’의 저자 댄 시먼스도 엘리슨이 찾아내기 전까지는 작품마다 퇴짜를 맞던 작가였다. 국내에도 출간된 알프레드 베스터의 소설 ‘컴퓨터 커넥션’에는 엘리슨의 추천사가 실려 있는데, 베스터를 모르는 독자들을 향해 “현대 순문학 어중이떠중이들이 사소설 나부랭이 직물의 마지막 코를 뜨고 있는 곳에서는 베스터의 단편을 실어주지 않기 때문”이라며 ‘이 머저리들’하고 일갈하는 모습을 보면 왜 이 성질머리 더러운 분이 또 한편으로 사랑받았는지 짐작이 가는 것이다.

작가를 찾아내는 그의 탁월한 안목은 ‘위험한 비전’(1967), ‘다시, 위험한 비전’(1972)이라는 두 권의 선집에서도 드러난다. 뉴웨이브 SF의 기념비적인 성과로 손꼽히는 이 선집은 수록작이 줄줄이 휴고상과 네뷸러상에 올랐고, 엘리슨 본인도 ‘67년 가장 훌륭한 SF 선집’으로 특별 표창장을 받았다. 로버트 실버버그, 필립 K. 딕, 로저 젤라즈니, 사무엘 R. 딜레이니, 래리 니븐 등 참여한 작가들의 이름도 쟁쟁하지만 이들 대부분이 당시에는 아직 신인이나 무명이었다는 점이 그의 안목을 증명한다. 두 책은 모두 전설이 되었고 세 번째 권인 ‘마지막 위험한 비전’은 다른 의미로 전설이 되었는데, 엘리슨이 1973년 이래로 아직까지도 출간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많은 독자들이 아직도 이 책의 출간을 기다리고 있고 많은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이 출간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늙어 죽었다.

할란 엘리슨의 탁월한 안목을 보여주는 SF 선집 ‘위험한 비전’.

더해서 엘리슨의 송사는 헐리우드에서는 악명이 높지만, 결국 영화업계에 저작권에 대한 경각심을 일으켰다. 어쩌면 헐리우드에 조금이라도 이야기가 유사해도 원작자를 표기하는 전통을 낳았을지도 모른다. 스티븐 킹은 자신의 논픽션인 ‘죽음의 무도’에서 “우리 같은 연약한 작가들은 ‘정말 잘하셨습니다, 선생님!’하고 외칠 수밖에 없다”고 치하하기도 했다. 웬만한 유사성에도 원작자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해도 무시하기 일쑤인 한국의 현실을 생각하면 이 나라에 할란 엘리슨이 없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할란 엘리슨, 아직 안 죽었다

2013년, 한 기자가 엘리슨이 강연 중 “나는 지금 죽어가고 있다”고 했다는 말에 놀라 황급히 전화를 했다. 엘리슨은 청중 하나가 자기를 계속 쫓아다니는 바람에 한 말이었다고 하며, “내 인생 전체가 놀랍다, 나는 감옥에 있거나 부랑자가 되었어야 했는데”하며 술회했다. 기자는 인터뷰를 끝낸 뒤 ‘할란 엘리슨, 아직 안 죽었다’는 제목의 기사를 썼다. 다음해 엘리슨이 뇌졸중으로 쓰러지며 이 기사가 다시 회자되었지만, 여전히 살아계신다.

엘리슨은 2009년에도 파라마운트가 ‘영원의 경계에 선 도시’에 대한 저작료를 제대로 지불하지 않는다며 소송을 걸었다. 동시에 ‘자신을 보호하지 못한’ 미국작가조합(WGA)에도 책임을 물어 소송을 걸었지만 여러 제반 조건을 생각해 청구비용은 너그럽게 1달러로 잡았다.

2010년에는 코맥 맥카시의 퓰리처상 수상작 ‘더 로드’가 자신의 소설 ‘소년과 개’를 훔쳤다고 주장했고, 같은 해 인기 애니메이션 ‘스쿠비 두’에서는 러브크래프트와 함께 미스캐토닉 대학의 문학교수로 등장해 직접 성우로 본인 자신을 연기했다. 2013년에는 그래픽노블을 써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80세를 넘긴 나이에도 유튜브 방송을 하며 다양한 주제에 대한 의견을 피력해왔다.

그렇다. 할란 엘리슨, 아직 안 죽었다.

김보영ㆍSF 작가

80년대의 할란 엘리슨. Pip R. Lagenta 촬영. 위키미디어
할란 제이 엘리슨 ®

1934년 3월 27일~ 미국의 SF소설가. 1,700 편의 중단편 소설, TV쇼 대본, 시나리오, 만화 대본, 에세이, 비평선 등을 썼다. 휴고상 8회, 네뷸러상 3회(평생 공로상 포함), 브람스토커상 5회(평생 공로상 포함), 에드거상 2회 등 다양한 분야에서 60여 개의 문학상을 탔다. 헐리우드에서 미국작가조합상을 네 번이나 수상한 유일한 작가이자, ‘스타트렉’ 에피소드가 이 상을 탄 것 또한 엘리슨이 유일하다. 국제펜클럽(International PEN)에서 저널리즘의 자유를 위한 공로를 인정받아 실버펜상을 수상했고 국제호러조합에서 ‘살아있는 전설상’을 받았다. 2006년 그랜드 마스터로 선정되었고 2011년 SF 영예의 전당에 올랐다.

<소개된 책>
제프티는 다섯 살

할란 엘리슨 지음

신해경 이수현 옮김

아작 발행

나는 입이 없다 그리고 나는 비명을 질러야 한다

할란 엘리슨 지음

신해경 이수현 옮김

아작 발행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친 짐승

할란 엘리슨 지음

신해경 이수현 옮김

아작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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