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2월 15일. 이용수ㆍ김군자 할머니는 미국 하원 공개 청문회에서 일본군 ‘위안부’의 존재와 일제가 저지른 반인륜 범죄에 대해서 증언했다. 그 용기 있는 증언에 힘입어 일본군 ‘위안부’ 문제 결의안이 통과됐다. 그 현장을 10년이 흐른 지금 스크린으로 마주할 기회가 왔다. 나문희ㆍ이제훈 주연의 영화 ‘아이 캔 스피크’ 이야기다.

끊임없는 민원으로 구청 직원을 괴롭히는 나옥분 할머니는 영어를 배우고 싶어한다. 미국에 있다는, 한국어를 하지 못한다는 동생 때문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영화는 할머니를 역사의 증언대로 데려간다. 노골적으로 참혹했던 상황을 재연하지 않아도, 보는 사람들은 알 수 있다. 옥분 할머니가 얼마나 지난한 시간을 보내왔고, 왜 그토록 간절하게 영어를 배우고 싶어했는지를. 바로 영화 속에서는 “증언할 수 있습니다”로 번역되는 단 세 단어의 영어를 입 밖으로 꺼내기 위해서다. 아이 캔 스피크. 나는 말 할 수 있습니다.

이 영화는 역사의 상처를 억지로 헤집어 놓지 않고도 아픔을 느끼게 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그것은 바로 흉터를 보여주는 것이다. 적어도 인간이라면, 인간이기 때문에 흉터를 통해 상처가 나고 피고름이 흘러나왔던 때를 상상할 수 있고 그 아픔에 공감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영화는 믿고 있다. 이 순진한 믿음을 가진 영화 속에서 나름의 원칙을 지키며 살아가는 9급 공무원 박민재가 이 영화를 통해서 ‘위안부’ 문제를 다시 잊지 않기로 한 일반 관객의 역할을 한다면, 옥분 할머니의 이웃과 친구로 등장하는 여자들은 실제로 서로 알고 또 모르는 고통을 나누는 동지처럼 보인다. 이들의 자매애는 마냥 강하고 단단하지만은 않다. 쉽게 오해하고 자주 갈등하며 때로 부딪히지만, 서로의 흉터를 발견한 뒤로는 잡은 손을 놓지 않는 여자들이 거기에 있다. 긴박한 순간에도 예의와 절차를 지키려고 하고, “얼마나 아팠냐”며 울며 끌어안고,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말하고, 눈물을 참으며 절규를 또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여자들이다.

나는 이들에게서 현실의 또 다른 많은 여자들을 보았다. 칼날 같은 바람이 불던 지난 겨울의 광화문 언저리에서, 넘실대는 촛불의 물결 사이에서 소녀상을 지키겠다고 노숙을 하던 소녀상 지킴이들을 보았다.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에게 자신이 일본군에게 당한 것과 같은 피해를 당한 베트남 여성들에게 사과하는 김복동 할머니를 보았다. 대가 없이 밤을 새우며 디지털 성범죄를 모니터링하고 수사를 요청하는 여자들을, 앞으로 긴 싸움이 될 것을 알면서도 속한 분야의 성폭력을 고발했던 여자들을 보았다. 그리고 옥분 할머니에게 ‘위안부’임을 믿어줄 수 없다며 윽박지르는 일본인들의 모습에서는 강간 피해자에게 네가 당한 것이 강간임을 증명하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당사자가 원하지 않는 합의를 해놓고 모른 척하는 사람들을 보았고, 지금 이 순간에도 시간이 흐르면 잊어버릴 것이라 비웃고 있을 사람들을 보았다.

그래서 이 영화는 오직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이야기만이 아니다. 침묵 당해온 사람들,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 겨우 말을 꺼내는 이야기다. 이들의 목소리는 때로 절규처럼 터져 나오기도 하고, 오랜 시간 침묵하고 있느라 잠기어 낮게 깔리기도 한다. 말해지지 않는 상처, 숨겨져야만 한다고 믿는 아픔들을 침묵 속에서 꺼내 놓는 일은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하지만 우리는 흉터를 보고도 아픔을 상상하지 못하는 이들이 인간인 척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니 그들이 아니라 공감할 줄 알고 상상할 줄 아는 사람들이 듣고, 귀 기울일 수 있도록 더 큰 소리로 더 늦기 전에 말해야 한다. 서로의 손을 부여잡고 있는 모든 세대의 여자들이 겪어온, 겪지 않아야 할 고통에 대해서. 나는, 우리는 말할 수 있다.

윤이나 프리랜서 마감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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