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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장충기 사장님, 잘 부탁 드려요

입력
2017.09.19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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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충기 사장. 그를 본 적도 없고 통화한 적도 없지만, 내게는 너무나 친숙한 존재다.

그가 삼성그룹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했던 미래전략실 차장을 지낸 거물급 기업인이라서 그런 게 아니다. 국정농단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언론에 이름이 자주 오르내려서 그런 건 더더욱 아니다.

그가 메시지를 남겼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주 많이 남겼다. 보름 동안 보고 또 봤더니 이제는 잠자리에서도 메시지가 눈에 아른거리고 귓가를 맴돈다. 그의 휴대폰엔 2014년 11월부터 2016년 10월까지 6,393개의 문자메시지가 저장돼 있었고, 2015년 8월부터 2016년 11월까지 7,123개의 카카오톡 메시지(그룹채팅 포함)가 남아 있었다.

메시지의 주된 내용은 장 사장이 가족과 동향 지인, 학교 동문들과 주고 받은 시시콜콜한 대화다. 안부를 묻고 약속을 정하고 행사를 알리는 내용 따위다. 미래전략실 직원으로부터 매일 보고 받는 언론보도 스크랩 내용도 메시지의 상당부분을 차지한다. 주요 신문과 방송에서 보도된 삼성과 오너일가 관련 내용을 주로 전달 받았다.

지난달 일부 매체가 보도한대로 장 사장과 메시지를 주고 받은 대상에서 언론인을 빼놓을 수 없다. 그의 휴대폰에 언론인이 많이 저장된 이유는 주된 역할이 언론홍보와 광고집행을 총괄하는 자리였던 영향이 컸던 것 같다. 업무적인 내용이 대부분이지만, 간혹 언론인 자신의 인사청탁 및 자녀나 친인척의 취업청탁 등 부적절한 내용도 섞여 있다. 기획기사 지면계획이 통째로 전달돼 삼성의 ‘승인’을 기다리는 경우도 있었다.

언론인이 전부는 아니다. 장 사장과 교류했던 인사들은 다양했다. 전ㆍ현직 경제부처 수장, 대학 총장과 교수, 굴지의 대기업과 금융기관 고위간부, 전ㆍ현직 국회의원 그리고 국가정보원 등 사정기관 인사들이다. 대부분 이름만 대면 알만한 사회지도층 인사들이었다. 특이한 점은 이들 대부분이 장 사장에게 무엇인가를 부탁하고 청탁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잘 부탁 드린다’는 메시지로 시작하거나 ‘감사하다’는 말로 끝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고급 골프장과 숙소를 무료로 잡아달라고 부탁하고, 최신 휴대폰과 공연티켓을 잘 받았다는 메시지도 눈에 띈다. 박근혜 정부의 실세 국회의원이 취업을 청탁한 흔적도 보였고, 민주당의 전직 국회의원도 집요하게 사적인 청탁에 나섰다. 문재인 정부의 핵심라인으로 지목된 학자와 경제관료도 장 사장의 교류 대상이었다.

법조인도 빠지지 않았다. 현직 검사장은 장 사장과 식사 약속을 잡았고, 현직 차장검사는 만나서 너무 반가웠다는 문자를 보냈다. 법원 고위간부는 눈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부적절한 문자를 여러 차례 보냈다. 검찰총장과 고검장, 지검장을 지낸 변호사들은 장 사장의 호의에 연신 고맙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사정당국 인사들은 삼성이 궁금해하는 정보를 쉴새 없이 제공했다. 합병이나 면세점 사업 등 그룹 현안은 물론이고 중요사건의 수사상황과 청와대ㆍ검찰 인사, CJ그룹 동향, 삼성에 적대적인 야당 정치인의 행보 등이 장 사장 휴대폰으로 전달됐다. 문제는 삼성이 먼저 요청하기 전에 대부분 자발적으로 정보를 제공했다는 점이다. 읽으면 읽을수록 삼성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보통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장 사장의 지인들은 그들의 자녀와 지인의 신입사원 취업을 부탁했고, 삼성에 이미 입사한 사람들의 인사이동과 승진도 부탁했다. 떼를 쓰며 ‘안 되는 걸 되게 해달라’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사람들은 그를 만나기를 원했고, 그와 대화하기를 원했다. 장 사장은 무례한 부탁에 짜증날법한 상황에서도 상대에게 친절했고 겸손했으며, 부탁한 내용을 최선을 다해 알아봐줬다.

장충기 사장, 메시지만 살펴보면 그는 문제적 인물인 동시에 호인이었다. 그렇다면 그와 메시지를 주고 받은 인사들은 어떤 평가를 받아야 할까.

강철원 사회부 기자 stro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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