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한 당신] 딕 그레고리

딕 그레고리는 흑인이 (비)웃음의 대상이나 소재가 아니라 백인을 웃길 수 있는 대등한 인간임을 최초로 입증한 스탠드업 코미디언이다. 그는 작은 쇼 무대를 통해 차별을 넘어선 사회를 개척했고, 그 길을 따라 수많은 흑인 코미디언 등 예능인들이 전국 극장과 방송에 진출했다. 그는 웃음의 힘을 믿었지만, 웃음만으로는 안 되는 일도 있다는 걸 알았다. 그는 전방위 인권운동가였다. wikimedia commons.

1960년대 이전까지 미국 흑인 코미디언은 백인을 말로 웃길 수 없었다. 재능이 없어서가 아니라 아예 기회가 없었다. 사실 흑인 존재 자체가 웃음의 소재이면서 (비)웃음의 대상이었다. 특유의 사투리나 어눌한 발음. 백인문화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며 스스로를 희화화하거나, 만만한 ‘아내’나 장모 등 가족ㆍ친지(역시 흑인)를 웃음거리 삼아야 했다. 그것도 대개는 흑인 분장(blackface)을 한 백인 코미디언의 몫이었다. ‘민스트럴 쇼(Minstrel Show)’는 차별과 조롱의 유서 깊은 코미디 장르 중 하나였다.

코미디는 연주나 노래, 춤과 달랐다. 이성으로 상대의 감정을 움직이는 일, 특히 건강한 웃음을 주고받는 건 슬픔이나 분노 못지않은 고도의 공감 능력이다. 거기에는 대등한 관계가 전제돼야 했다. 흑인 코미디언은 흑인들의 무대에서만 병든 시대와 우쭐대는 백인들을 조롱할 수 있었다. 그것도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그랬으니, 하룻밤 공연료 5달러로 변두리 극장을 전전하던 28세 무명 흑인 코미디언 딕 그레고리가 61년 1월 휴 헤프너(Hugh Hefner)의 ‘시카고 플레이보이 클럽’ 백인 무대에 선 것 자체가, 비록 스타 코미디언 어윈 코리(Irwin Corey)가 갑자기 공연을 펑크 내는 바람에 얻은 기회이긴 했지만, 놀라운 일이었다. 더욱이 그가 웃겨야 할 이들은 딥 사우스 조지아 주 냉동식품업계 경영자들이었다. 오너의 추천에도 불구하고 그가 흑인인 줄은 몰랐던 클럽 매니저는 뻔한 불상사를 우려해 그레고리를 되돌려 보내려 했다. 그레고리는 버텼다. 그 추위에 무려 스무 블록을 달려온 데다 무일푼이라 집에 돌아갈 차비도 없었다고, “공연하다 맞아 죽어도 좋으니 해보겠다고 사정했다”고 한다.(encyclopedia.com) 1회 공연료도 그로선 언감생심 50달러나 됐다.

“그날 나는 어머니의 미소를 떠올렸다. 어머니는 ‘흑인 소년은 감정을 감추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가르쳤다.(…) 손님들은 더러운 말로 야유했지만 나는 그들보다 더 빨랐고, 또 웃겼다.” 그러자 그들도 듣기 시작했다. “저도 남부를 조금 압니다. 거기서 하룻밤 동안 20년을 보낸 적이 있거든요(I spent 20 years there one night)”란 그날의 개그는 아마도 웃기려는 허풍이었겠지만, 흑인에겐 하루가 20년 같더라는 의미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쨌건 50분 예정이던 쇼는 100분 동안 이어졌다. 그는 클럽과 3주 고정출연 계약을 맺었고, 계약은 3년간 이어졌다.

흑인 대통령을 선출하는 일만큼은 아니었겠지만, 그건 단연 뉴스였다. 명성과 영향력이 지금과는 또 달랐던 시사주간지 ‘Time’은 “지적이고, 섬세하며, 흑인 특유의 저속한 익살과는 다른(…) 대형 나이트클럽 무대에 선 최초의 흑인(Negro) 코미디언”이라며 그레고리를 소개했고, ‘뉴스위크’ ‘에스콰이어’ 등 잡지와 뉴욕타임스 등 신문 보도가 뒤를 이었다. 1년 뒤 그는 잭 파(Jack Paar)가 진행하던 인기 TV토크쇼 ‘투나잇 쇼’에 진출했다. 막간 공연자가 아니라 호스트와 나란히 소파에 앉은 최초의 흑인 초대손님이었다. 방송출연 이후 그레고리의 클럽 공연료는 주당 250달러에서 하루 5,000달러로 폭증했고, 그를 초대하려는 공연장이 줄을 섰다. “그 뒤 1년 반 동안 390만 달러를 벌었어요. 그런 게 바로 힘(power)이죠.”(hollywoodreporter.com)

훗날 스타가 된 레드 폭스(Redd Foxx)는 뉴욕타임스 61년 인터뷰에서 “그레고리가 문을 열었어요. 이제 우리에게도 기회가 생긴 셈이죠. 혼자 같은 날 여러 도시에서 동시에 공연할 수는 없지 않겠어요?”(LA Times, 17.8.19) 코미디 무대의 인종 장벽을 헐어 빌 코스비(Bill Cosby) 같은 흑인 희극인들의 길을 개척하고, 웃음으로 차별 현실을 고발하며 사회를 설득했던 딕 그레고리가 8월 19일 별세했다. 향년 84세.

인기와 돈을 ‘힘’이라고 했지만, 유년의 그레고리가 깨달은 웃음의 힘은 달랐다. 그는 1932년 10월 12일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에서 편모의 6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어머니가 온갖 궂은 일로 번 돈과 영세민보조금이 수입의 전부였다. 그레고리는 가난한 동네의 가장 가난한 집이 그의 집이었다고 말했다. “우리 오누이들은 바닥에 떨어진 음식은 결코 주워 먹지 않았다. 누가 뭘 떨어뜨리면 그게 바닥에 닿기 전에 누군가 낚아챘으니까.” 또래 아이들이 그를 따돌리고 괴롭힌 건 흑인이어서가 아니라 가난해서였다. 64년 자서전 ‘nigger’에 그는 이렇게 썼다. “유머의 위력을 깨달은 게 그 무렵이었던 것 같다. 조크의 힘…. 내가 조크를 하면 그들은 나를 비웃지 않고 함께 웃었다(laugh with me instead of at me). 비로소 아이들이 내 등을 누르는 게 아니라 내 곁에 있고자 했다.”(NYT, 17.8.19)

그가 고교 육상부에 든 것도 매일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할 수 있어서였다고 한다. 그는 빼어난 단거리 주자로 육상부 주장이 됐고, 그 덕에 특기생으로 서든일리노이대에 진학했다. “대학 트랙은 고교 때와는 달랐다. 고교시절엔 가난과 싸워야 했지만, 대학선 ‘니그로 라는 존재’와 싸워야 했다.”

54년 군에 입대해 자의반 타의반 출전한 쇼 경연에서 입상, 우리 식으로 말하면 문선대에 배속됐고, 56년 제대한 뒤 복학을 포기하고 시카고에 터를 잡았다. “대학은 나를 가르치려 하기보다는 달리게만 하려 했다”고 그는 말했다. 낮에는 우체국이나 세차장에서 일하고 밤에 흑인 쇼 무대에 서는 무명 코미디언의 생활 끝에 58년 돈을 빌려 자기 클럽을 열었다가 망했다. 59년 말부터는 한 클럽을 임대해 이런저런 파티를 진행(organizing)해주는 일을 하기도 했다. 일이 없을 땐 헐값 공연 등에 불려 다니며 코미디 기량을 닦았다. 휴 헤프너가 그를 눈 여겨 본 것도 한 흑인 클럽에서였다고 한다.

비평가들은 그의 연기가 백인에게 통한 건 예민한 문제를 풍자하면서도 백인을 비난ㆍ훈계하지도 흑인을 비하하지도 않아서라고, “전미흑인지위향상협회(NAACP)와 학부모교사연합회(PTA)를 동시에 웃길 줄 알았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LAT, 위 기사) 그는 쓰리버튼 수트 차림으로 스툴에 앉아, 무심한 듯 자분자분 이런 개그들을 했다.

“NAACP에서 평생회원권을 사라고 찾아왔어요. 저는 일주일권은 없냐고 물었죠. 언제 차별이 없어질지(integrated) 모르는 일 아닌가요?”

“사실 흑백분리(segregation)가 무조건 나쁜 건 아니죠. 버스 충돌사고로 뒷좌석 승객이 다쳤다는 말 들어보셨나요?”

“남부에서 온건(moderate)하다는 건 고양이가 키 작은 나무에서 당신을 습격하는 겁니다.”

“흑인 우주비행사도 사실 무지 많아요. 최초 태양 탐사를 위해 아껴두는 거예요.”

몸값 비싼 그의 공연 관객은 대부분 백인이었다. 그는 “나는 흑인이 아니라 사람으로 무대에 선다. ‘웃기는’ 흑인이 아니라 흑인 ‘코미디언’이어야 한다는 게 원칙이었다”고 말했지만, 저만 한 개그를 하는 데도 실력과 용기, 배짱이 필요했을 것이다. 60년대 남부에서는 말 한 마디, 표정 하나 때문에 맞거나 살해당하는 흑인이 드물지 않았다.

1964년 딕 그레고리. 그는 흑인 최초로, 61년 백인 코메디 쇼 무대에 섰고 이듬해 인기 토크쇼 '투나잇쇼'의 게스트로 초대됐다. 저 무렵의 그는 엄청난 개런티를 받는 밤무대 스타였지만, 낮의 그는 남부 미시시피 주와 조지아 주 등지의 시위 현장을 누비며 툭하면 투옥되고 얻어맞곤 했다.

“어느 날 남부의 한 레스토랑에 갔더니 종업원이 ‘We don’t serve colored folk here(흑인은 안 받는다)’더군요. 저는 ‘나도 흑인은 안 먹는다. 대신 튀김통닭을 달라’고 했죠. 그랬더니 KKK 회원 같은 이들이 자기 치킨을 들고 와서는 ‘네가 통닭에게 하는 것과 똑 같이 내게 해주겠다’며 위협하는 겁니다. 해서 치킨 다리를 벌려 엉덩이에 키스를 했어요. 그리고 말했죠. ‘청년들 줄을 서시오!’라고요.”(rollingstone.com) ‘serve’의 두 용법 ‘(~에게) 차려주다’와 ‘(~을) 차려주다’를 이용한 저 개그는 훗날 스티븐 핑커가 책 ‘언어 본능’에 언어유희의 예로 인용했다.

스타가 된 그레고리는 클럽보다 거리와 강당에 더 자주 섰다. 그만큼 그를 초대하는 곳이 많았다. 피살되기 한 해 전인 62년 흑인 민권운동가 미드가 이버스(Medgar Evers, 1925~1963)의 미시시피 주 잭슨 시의 흑인 유권자 등록 캠페인을 비롯, 그레고리는 마틴 루터 킹의 63년 워싱턴 행진과 이듬해 미시시피 ‘자유의 여름’ 캠프, 65년의 셀마-몽고메리 행진의 선두 혹은 단상에 섰다. 65년 LA 와츠 폭동 때는 총상을 입었고, 경찰에도 10여 차례 연행돼 며칠씩 구류를 살았다. 63년 버밍엄 유치장에서는 “생애를 통틀어 그렇게 심하게 맞아본 적이 없었다”고 했다. 미국 학생비폭력조직위원회(SNCC)의 유권자 등록운동이 활발하던 무렵 미시시피 주정부가 빈민 구호양곡 배급을 중단하자 그레고리는 전세 비행기를 띄워 수 톤의 식량을 전달하기도 했다.

저술가 로버트 립사이트(Robert Lipsyte)와 함께 쓴 64년 자서전 ‘nigger’는 700만 부가 팔렸다. 그 책을 어머니에게 헌정하며 그는 서문에 이렇게 썼다. “언제든 당신이 ‘nigger’라는 말을 들으면, 내 책을 선전해주는 거라 아시면 됩니다.”(theroot.com) NPR 인터뷰에서 그는 “nigger는 미국서 가장 많이, 특히 흑인들이 입에 달고 사는 단어다. ‘그렇다면 벽장에서 꺼내자, 바깥에 내놓고 당당하게 쓰면서 뭐가 문젠지 해부해보자’는 심정으로 제목을 달았다. 요즘은 그 단어를 ‘N-word’라고 하더라. 그렇게 불리면 안 된다. 당신들은 스와스티카(나치 문장)를 다른 말로 부르나?”(npr.org)

그는 67년 시카고 시장 선거에 출마했고, 이듬해에는 ‘자유와 평화당(FPP)’ 기명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도 출마했다. 그렇게 그의 낮과 밤이 달랐다. 그는 시위 현장에서 경험한 것들을 소재로 밤 클럽에서 관객을 웃겼다.

쇼 코미디언으로서의 자기 검열, 속내를 감추라는 어머니의 가르침을 지켜가는 게 점점 힘들고 싫어졌을 것이다. 73년 그가 주위 충고를 뿌리치고 클럽ㆍ극장 공연을 중단한 것은, 표면적으로는 흑인들의 영혼을 좀먹는 술과 담배, 마약이 있는 곳에서 일할 수 없다는 거였지만, 시위 현장의 두려움을 넘어서는 용기와 자유가 더 좋아서이기도 했을 것이다. 물론 그는 부자이기도 했다. 그가 거리보다 공연장에 있는 게 운동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누군가의 충고에 그는 “미국도 전쟁터에 코미디언을 보내지는 않는다”고 응수했다. 그는 스스로를 전사라 여겼다. 그 싸움은 흑인과 백인의 싸움이 아니라 정의와 불의의 싸움이라고 그는 말했다.

70년대 중ㆍ후반, 미국의 정치 사회 문화는 급격히 보수화했다. 베트남 전쟁이 끝난 뒤였다. 석유파동이 잇따라 닥쳐왔고 미국 기업 경쟁력도 예전 같지 않았다. 헤리티지 재단 등 보수 싱크탱크는 먹고 살기 팍팍해진 현실의 책임을 뉴딜 같은 좌파 정책에 물었고, 그 결과가 80년 레이건의 집권이었다. 거리는 고요해져 갔다.

2016년 4월 워싱턴D.C에서 열린 '월드비전'의 여성이주노동자 차별 항의 집회 현장의 딕 그레고리(오른쪽 두 번째). 인지도나 영향력은 예전 같지 않았겠지만, 그는 차별에 맞서는 다양한 싸움 현장을 찾아 다녔다.

그레고리의 전장은 대신 다양해졌다. 페미니즘, 동물권 옹호, 남아프리카공화국 아파르트헤이트 반대운동, 국제평화 및 기아 근절…. 1978년 평등권 수정조항(ERA) 비준 및 시한 연장을 요구하며 전미 여성단체 회원들이 벌인 펜실베이니아 의사당 행진 대열 선두에도, 베티 프리던, 글로리아 스타이넘 등과 함께 그가 있었다. ERA도 82년 끝내 폐기됐다.

평화주의자로서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70년대 초부터 채식주의자가 된 그레고리가 다이어트와 영양, 단식에 빠져든 것도 미국 사회가 변혁 탄력을 잃어가던 70년대 말 무렵부터였다. 그는 80년대 초 한 스웨덴 건강식품업체와 회사를 설립, ‘슬림 세이프 바하미언 다이어트’같은 유동식 분말을 판매하다 금세 망했다.

그가 음모론자의 면모를 대놓고 드러낸 것도 70년대 중ㆍ후반 그 무렵부터였다. 마틴 루터킹과 존 F. 케네디 일가 피살, 반전ㆍ평화운동을 함께 하며 친구처럼 지냈던 존 레논의 이른 죽음, 심지어 9ㆍ11의 배후에도 국가와 FBI, CIA 등이 감추고 있는 ‘진실’이 있다고 그는 공개적으로 주장하곤 했다. 마이클 잭슨이 아동 성추행 혐의로 기소됐을 때는 수시로 그를 만나 조언하는 한편 그의 무죄를 확신한다며 40일 단식을 감행했고, 후배 코미디언 빌 코스비의 성폭행 혐의에 대해서도 피해 여성들에 대한 2차 가해성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그는 그들이 잘난 흑인이어서 겪는 수난이라 여겼다. 언론은 그의 주장들을 호의로 무시하거나 가십으로 다뤘지만, 퇴물 코미디언의 노망이라 여긴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96년 1월 조지아 주 애틀란타에서 열린 고(故) 마틴 루터 킹의 67번째 생일 기념연에는 빌 클린턴 당시 대통령이 참석했다. 그레고리도 연단에 섰다. 그는 두 달 전인 95년 11월 뉴트 깅리치 당시 공화당 하원 의장이 이스라엘 전 총리 이츠하크 라빈 장례식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길에 대통령 전용기를 얻어 탔다가 “뒷좌석에 처박혀” 푸대접 받았다며 공개적으로 불평한 일을 언급하며, 남부 흑백분리정책에 빗대 깅리치가 ‘니그로 하루 체험 a Negro for a day’을 한 모양이라고 말했다. “너무 화가 난 나머지 그 아이(Boy, 깅리치)는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아예 정부를 폐쇄시켜 당신(클린턴)을 사색이 되게 하지 않았나. 당신이 그에게 니그로 한달 체험을 하게 했다면 어쩔 뻔 했나.”(cnn.com) 정부 폐쇄란 당시 하원이 연방정부 적자 해소안 이견으로 예산안 처리를 보류, 95년 11월 14~19일과 12월 16일~ 96년 1월 6일까지 연방정부 업무를 사실상 마비(shut down)시킨 일을 두고 한 말이었다. 그는 말년까지 기민한 코미디언이었다.

그는 59년 흑인 클럽에서 만난 릴리언(Lillian)과 결혼, 10남매를 두었다. 그는 얼굴조차 보기 힘든 남편이고 아버지였으나 자녀들은 그의 아버지를 자랑스러워했고, 그는 아이들 모두 말썽 없이 대학 나와 어엿한 시민으로 성장한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사인은 요로감염 합병증이었다. 클린턴은 그를 “이 행성에서 가장 웃기는 남자”라며 추모했고, 그의 팬이었다는 천체물리학자 닐 디그래스 타이슨은 “그가 늘 말했듯이, 웃음은 이 불의의 세상에서 정의를 위해 싸우는 모든 이들의 연료다”라고 썼고, 제시 잭슨 목사는 “그는 우리에게 웃는 법과 싸우는 법, 그리고 사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고 트위터에 썼다.

그레고리는 2000년대 초 공연 무대로 복귀해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 공연했다. 8월 버지니아 샬러츠빌 백인인종주의자 폭력시위를 보면서 병석의 그는 “‘아직 할 일이 너무 많다”고 말했다고, AP뉴스는 전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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