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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범죄는 없다] “18년 전 현금인출기에 남긴 그 얼굴, 100여명과 대조했더니…”

입력
2017.09.12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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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서 30대 주부 시신 발견

성폭행 당한 뒤 목 졸려 사망

ATM기 CCTV에 범인 찍혀

대대적 수사 불구 검거엔 실패

# 김응희 형사, 집념의 추적

당시 수사팀 막내급이던 김 경감

공소 시효 연장 알고 재수사 돌입

혈액형ㆍ사진 비교해 용의자 압축

# 쐐기 박은 결정적 증거

최종 10명 추려… 담배꽁초 수거

경기 양주 살던 범인 DNA 확인

주거지서 체포 범행자백 받아내

“피고인을 무기징역에 처한다.”

4월 4일 오전 10시 서울북부지법 302호 법정. 판결문을 읽는 재판장 박남천 부장판사의 목소리는 낮고 무거웠다. “이 법원이 적법하게 채택하여 조사한 증거들에 의하면 피고인에게는 살인의 고의가 있었다고 봄이 상당하다.” 의자에 기댄 듯 엉거주춤 서 있던 피고인은 좀처럼 고개를 들지 못했다. “고의적으로 피해자를 살해하지는 않았고, 죽을 수도 있다는 인식도 못했다는 피고인과 변호인의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법정 안 모든 눈과 귀가 재판장에게로 쏠렸다. “재범 가능성을 영원히 차단하고, 생명 존중이라는 고귀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 기간의 정함이 없이 사회로부터 격리된 수감 생활을 통해 자신의 잘못을 진정으로 참회하고 속죄하도록 하는 것이 적정하다고 판단해 주문과 같이 무기징역을 선고한다.” 재판장은 무표정했다.

시신으로 발견된 30대 여성, 용의자는 사진만 남긴 채

사건은 19년 전인 1998년 10월 27일 서울 노원구 한 아파트에서 30대 중반 여성 이모씨가 숨진 채 발견되면서 시작됐다. 안방 바닥에 대각선으로 엎드린 채 손은 뒷짐을 진 형태로 허리끈에 묶여 있었다. 발목은 노끈, 입은 넥타이로 결박됐던 흔적도 또렷했다. “학교에 갔다 왔는데 엄마가 쓰러져 숨을 쉬지 않고 있었어요.” 처음 시신을 발견한 건 이씨의 초등 5학년 딸이었다.

목에는 여성용 가죽 허리띠가 느슨하게 걸려 있었고 얼굴에는 피가 쏠려 만들어진 울긋불긋한 울혈이 보였다. 현장을 출동했던 경찰은 “살짝 혀가 튀어나와 있었고, 누가 봐도 목이 졸려 살해 당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며 “하의가 살짝 내려가 있어 성폭행을 당한 뒤 목숨을 잃은 것이 아닌가 추정했다”고 당시를 설명했다.

이씨 몸과 집 안에는 몇 가지 단서가 있었다. 피해자 몸에서 검출된 체액에서는 ‘혈액형 AB형 남성’의 DNA가 나왔다. 안방에서는 이씨의 것이 아닌 것으로 추정되는 머리카락 한 올과 체모 두 가닥이 발견됐다. 다만 구체적인 DNA정보 추출에는 실패했다. 경찰 관계자는 “그 당시엔 혈액이 아닌 머리카락이나 체모에서 DNA정보를 검출할 만큼 실력을 갖추지 못했다”고 했다.

안방 장롱에 있었는데 사라진 이씨 남편 체크카드 인출 내역이 범인 행적을 일부 드러냈다. 시신이 발견된 당일 오후 3시쯤 중구 을지로 지하상가 현금자동입출금기(ATM) 두 대에서 20분 동안 10회에 걸쳐 151만원이 인출된 것. 무엇보다 ATM기 폐쇄회로(CC)TV에 범인 얼굴이 찍혀 있었다. 흑백에 그리 좋지 않은 화질이었지만 정면으로 찍힌, 이목구비를 충분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에서 찍힌 ‘보기 드문’ 화면이었다. 일부 행적과 얼굴 확보는 크나큰 소득이었다.

통화기록 추적 등 추가 수사가 진행됐다. 피해자는 사건 당일 낮 12시32분과 43분, 누군가와 두 차례 연이어 통화했다. 공교롭게 모두 공중전화. 먼저 온 전화의 발신지는 지하철4호선 노원역 2층이었고, 다음 전화는 노원역과 이씨 아파트 중간 지점에 있는 상가에서 걸려왔다. 시간 흐름과 동선을 유추해볼 때,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컸다. ‘신원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일부러 공중전화를 이용. 오후 1시쯤 피해자 집에 도착해 어떤 이유로 몸싸움을 벌이다 몸을 묶고 성폭행한 뒤 살해하는데 1시간 정도. 택시를 타고 을지로로 가서 오후 3시쯤 돈을 인출. 그리고 잠적.’ 경찰 머리 속에 퍼즐이 조금씩 맞춰져 가고 있었다.

단서가 쌓이면서 경찰의 발걸음은 빨라졌다. 얼굴도, 혈액형도 ‘나름대로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형사 50여명이 투입된 수사본부가 도봉경찰서에 꾸려졌다. 목격자 확보가 시급했다. 수사본부는 당시 한 방송국 공개수배 프로그램에 범인 사진까지 대대적으로 공개했다. 방송이 나가자 제주에서, 경남 하동군 골짜기에서 닮은 사람을 봤다는 제보가 쏟아졌다. 형사들은 이들을 일일이 찾아간 뒤, 양해를 구하고 채혈까지 해 피해자 체액에서 나온 DNA와 비교했다.

그러나 결과는 하나같이 ‘일치하지 않는다’였다. “울산에서 사진과 정말 똑같이 생긴 사람을 만났는데, DNA가 전혀 일치하지 않더라고요. 심지어 그 사람 아버지까지 (범인이) 아들과 똑같이 생겼다고 시인할 정도였는데. 아무 소득이 없었어요.”(당시 수사본부 관계자) 시간이 지나면서 아무런 소득이 없자 수사본부는 점점 쪼그라들었고, 그렇게 2년이 흘러 2000년 12월 19일 ‘불상(不詳) 기소중지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됐다. 수사본부는 해체됐고 사건은 영구미제로 기억에서 지워져 갔다.

18년 전의 쓰라림. 다시 추적은 시작되고.

“그 놈을 기필코 잡아야겠습니다.” 지난해 5월말, 18년 전 당시 수사본부에서 막내 급으로 현장을 누비던 김응희(53) 경위(현재 경감)가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대 광역1팀으로 오면서 사건은 다시 수면 위로 올랐다. “마침 기획 수사에 전념할 수 있는 광수대에 왔을 뿐”, 특별히 다른 이유는 없었다. 팀원들은 꼭 잡고 싶다는 김 경위의 일념에 적극 화답했다.

공소시효가 일단 마음에 걸렸다. 살인 사건 공소시효는 15년. 2013년 시효가 끝난 터라 더 이상의 수사는 의미가 없었다. 2015년 8월부터 살인죄 공소시효를 폐지하는 내용의 ‘태완이법(형사소송법 개정안)’이 시행됐지만 2000년 8월 이후 사건에만 적용이 됐다. 세월이 야속했다.

그때 팀원 한 명이 “이런 법이 있는데, 혹시 적용될까요”라며 2010년 제정된 ‘성폭력범죄의처벌등에관한특례법’을 내밀었다. ‘DNA 등 그 죄를 증명할 수 있는 과학적인 증거가 있는 때에는 공소시효가 10년 연장된다’는 조항이 눈에 띄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 확인 결과, 다행히 당시 피해자에게서 채취한 체액이 튜브 형태로 고스란히 보존돼 있었다. 공소시효가 여전히 남아있다는 뜻이었다.

김 경위와 팀원들은 곧바로 서울북부지검으로 달려가 창고에 쌓여 있던 사건 기록을 받아왔다. “우리 팀이 손 안 댔으면 그 사건은 끝이었을 겁니다. 누구도 다시 들여다보지 않은 채 그렇게 창고 구석에 있다가 잊혀졌겠죠.” 팀원들은 누렇게 빛이 바랜 1m 넘는 서류 더미를 꼼꼼히 살피는 것으로 ‘재도전’을 선언했다. 동시에 국과수와 검찰이 2010년부터 구축하기 시작한 구속피의자 DNA 데이터베이스에 용의자 DNA와 똑같은 게 있는지 분석을 요청했다.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

18년 전 사건이니, 18년 전 방식으로 일단 사건을 풀어가기로 했다. 당시 화면에 찍힌 얼굴을 근거로 범인을 20대 후반이라 예측했다. 1965년생부터 1975년생까지 범위를 넓게 잡았다. 조금이라도 비슷한 수법을 사용했던 강도 및 절도, 성폭력, 살인 전과자들 중 해당 범위에 들어가는 사람들을 추렸더니 대략 8,000명이 나왔다. 이 중 혈액형이 AB형인 사람은 900여명. 노원구에서 범행을 저지를 개연성이 낮은 사람부터 차례로 제외시키는 작업을 했더니 125명까지 범위가 좁혀졌다. 모두 AB형 남성으로, 98년 당시 23~33세였고, 서울 인근에서 범행을 저지른 적 있거나 연고가 있던 사람들이었다.

김 경위는 이들의 현재 사진과 과거 사진을 모아 CCTV에 찍힌 얼굴과 비교해 나갔다. 주민센터 등에 공문을 보내 20대 시절 주민등록증이나 운전면허증 등 발급에 사용했던 사진을 받아냈고, 40대가 된 최근 사진도 구했다. 과거 사진, CCTV 용의자 얼굴 사진, 현재 사진을 놓고 한참을 들여다 보며 전혀 다르게 생긴 사람들부터 추려내기 시작했다. 몇 주간 진행된 지루한 작업, 그렇게 최종 후보군 10여명이 수사팀 책상 위에 놓여졌다.

수사는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DNA 비교를 통해 쐐기만 박으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의심이 간다는 이유만으로 최종 후보군 10여명 DNA정보를 마음대로 받아낼 순 없었다. 팀원들이 궁리해낸 방법은 ‘담배꽁초 몰래 가져오기’. 먼저 최종 리스트에 오른 전과자 중 구치소에 있는 사람에게 접근해 그가 버린 담배꽁초를 주워왔다. 과거 사진이 용의자와 유난히 닮은 두 명의 담배꽁초를 주워 DNA를 추출, 범인의 것과 대조했으나 ‘꽝’이었다. 거기서 포기할 순 없었다.

세 번째 후보는 경기 양주시에 살고 있던 44세 오모씨였다. “머리 가르마 위치와 콧구멍 각도까지 똑같다”는 말이 오씨 사진을 본 수사팀에서 나와 지목됐다. 오씨 아파트 근처에서 잠복하던 형사들이 아파트 베란다에서 오씨가 던진 담배꽁초를 수거하는 데 이틀 걸렸다. 느낌이 좋았다. “이 사람 맞습니다! 18년 전 피해자 몸에서 발견된 DNA와 정확히 일치해요.” 국과수에서 긴급감정 결과가 수사팀으로 전해졌다.

오씨는 지난해 11월 11일 주거지 아파트 지하에서 긴급 체포됐다. “강간 살인 혐의로 체포한다”는 형사들 통보에 “무슨 말이냐”고 되묻던 오씨는 경찰서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 범행을 순순히 자백했다.

당시 생활정보지에 나온 전셋집 정보를 보고 이씨를 찾아갔다가 “전세보증금을 좀 깎아달라“고 했는데, “보증금도 없이 집을 보러 다니느냐”는 말에 화가 났다는 것. 우발적이었고, 죽일 의도는 전혀 없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씨 부검을 맡았던 강신몽 가톨릭대 의대 교수는 “목에 있는 물렁뼈가 골절될 정도로 힘을 강하게 줬다”며 “피해자가 죽어가는 중에도, 또 숨이 끊긴 뒤에도 지속적으로 허리띠로 목을 졸랐다“고 판단, 오씨가 의도적으로 살해했다고 설명했다.

피해자 가족들이 고통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오씨는 대구에서 청소년 성매매 알선을 하다가 유죄 판결을 받는 등 반성 없는 삶을 살아왔다. 살인 사건 이전에도 세 번이나 여성을 상대로 특수강도 범행을 저질렀던 것으로 드러났다. 결혼 생활도 순탄치 않아, 여러 번 이혼과 재혼을 반복한 것으로 알려졌다.

곽주현 기자 z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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