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능한 게임 개발자가 회사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과거 한국의 경우 시대를 풍미할만한 뛰어난 개발자가 많이 배출됐다. 물론 요즈음은 뜸하지만 말이다.

중국 게임 업계의 경우 협업이 강조되다 보니 개인의 능력이 주목받지 않는 것 같지만, 오히려 유명한 스타급 개발자 개인의 명성이 회사 전체에 도움이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오늘은 스타급 개발자에 대한 주제를 다뤄보고자 한다. 바로 <왕자영요>를 개발한 개발자의 일대기이다.

# <왕자영요>와 야오샤오광

‘청소년들을 게임 중독에 빠뜨린다’ 며 인민일보의 공개 비판을 받은 <왕자영요>의 2017년 1분기 수입은 이미 1조(60억 위안)을 뛰어넘었다. <왕자영요> 하나의 수익만으로 중국 상장회사의 94%의 실적을 넘어서는 경이적인 수준인데, 우리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게임의 개발자는 바로 야오샤오광(姚晓光)이라는 인물이고 바로 오늘 차이나 랩에서 소개할 인물이다.

중국 IT기업 텐센트의 계열사 티미의 대표 개발자 야오샤오광. 디스이즈게임 제공.

2012년 텐센트의 전략회의에서 위챗(wechat)을 개발한 장샤오룽(张小龙)은 8시간의 강연을 한 적이 있었다. 당시 야오샤오광은 림랑천상(琳琅天上) 스튜디오의 총 책임자로 이 회의에 참석한 바 있다. 미래 게임산업은 모바일게임 중심이 될 것이라는 텐센트의 핵심전략에 의해 자체 게임개발부문의 유능한 개발자였던 야오샤오광이 그 자리에 초대받은 것이다. 그 자리에서 야오샤오광은 플랫폼(위챗, QQ)을 활용한 모바일게임 개발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 <디아블로>를 능가하는 게임을 만들겠다!

1993년 여름 야오샤오광의 아버지는 아들의 컴퓨터 능력을 알아보기 위하여 <베이직 언어>라는 책에서 퀴즈를 내줬다. 야오샤오광은 아버지의 퀴즈에 만족스러운 답변을 할 수 있었고 아들의 훌륭한 컴퓨터 재능에 만족한 아버지는 아들에게 ‘386 컴퓨터’를 사줬다. 야오샤오광 최초의 PC였으며, 그의 일생은 여기서 결정됐다.

17세 생일날 야오샤오광은 친구를 초대하여 집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식사 후 야오샤오광은 <디아블로>를 친구들과 다중게임 모드를 통해 처음으로 클리어하는 기쁨을 맛보았다. 이때 야오샤오광은 처음으로 게임의 재미를 느꼈고 <디아블로>를 능가하는 게임을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그의 일생에 큰 전환기였다.

컴퓨터를 접하기 전 야오샤오광의 취미는 그림 그리기였는데, 백지에 새로운 세상을 펼치는 일에 큰 성취감을 느꼈다. 자기 생각에 따라 세상을 창조하겠다는 생각은 그가 게임 개발 업계에 종사하게 된 가장 큰 이유가 됐다.

그 후 야오샤오광은 베이직, 비주얼베이직, C++ 등 개발 도구를 독학으로 능숙하게 다룰 정도로 학습했다. 대학생이 된 그는 중국 네티즌 중에서는 처음으로 (게임에 관련한 닉네임인) NPC6라는 닉네임을 사용하게 됐다. 그 해 여름방학 그는 교수와 함께 최초로 멀티미디어 소프트웨어를 제작함으로써 2,000위안의 보수를 받았다.

당시 그가 가장 자주 방문한 사이트는 야후의 게임개발 사이트였고, 그는 이 사이트에서 운풍(云风), 빙하(冰河) 등 중국의 1세대 게임 개발 스튜디오를 접하게 되었다. 덧붙여 게임 제작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본격적인 교류를 시작했다. 이를테면 한국 게임개발의 본산지인 하이텔의 '게임제작동호회'와 비슷한 과정인 셈이다.

게임 디아블로의 메인 이미지. 디스이즈게임 제공.
# 비쥬얼베이직과 다이렉트X 7.0으로 만든 첫 게임

당시 대학생이던 그는 중국 게임 업계가 큰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는 못했다. 1997년 중국의 많은 회사가 게임업계에 뛰어들어 패키지게임 개발 열풍을 일으켰지만, 1년 만에 중국산 게임 개발 환경이 악화되면서 게임개발사들은 제대로 된 제품 하나 내놓지 못한 채 대거 철수하게 된다. 중국의 자체 개발 붐은 3년 만에 사라지게 된 셈이다. 이후 중국게임업계는 게임 출판 쪽으로 전념했으며, 그 대상은 주로 한국산 게임이었다.

이때 야오샤오광은 혼자서 <디아블로>를 연구하고 있었다. 그는 수학에 능통한 친구와 함께 비쥬얼 베이직과 다이렉트X 7.0으로 <디아블로>를 모방한 데모를 만들었다. 이 데모로 야오샤오광은 처음으로 게임 개발 관련 일자리를 찾게 됐다.

바로 샨다(盛大网络, SNDA)의 설립자인 천티엔차오(陈天桥)의 의뢰를 받아 <인터넷 폭탄 개(网络炸弹狗)>라는 게임을 개발한 것이다. 현재 수십억 위안의 자산을 보유한 천티엔차오는 당시에는 애송이 청년 창업자에 불과했다. 이후 그는 주식으로 번 돈 50만 위안을 투자하여 샨다(盛大网络, SNDA)를 창업했다. <인터넷 폭탄 개>는 현재 <파오파오탕(泡泡堂)> 유사한 게임이고 사실은 <파오파오탕>의 경우는 넥슨의 <크레이지 아케이드>에 모티브를 얻은 게임이기도 하다. 게임 개발이 마무리 단계에 들어선 무렵 샨다는 해당 프로젝트를 중지시켰다.

# 이어진 드롭, 또 드롭

이후 2000년 야오샤오광은 대학을 졸업했다. 그의 부모는 자식이 부모의 회사에서 일하기를 희망했다. 과거 한국처럼 중국에서도 게임개발자는 미래가 불안정한 직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야오샤오광은 부모의 말을 듣지 않고 북극빙(北极冰, 훗날 아련게임으로 발전)에 입사했다.

2000년 5월 야오샤오광은 북경에 와서 북극빙의 책임자 다이홍(戴红)을 만났다. 다이홍은 야오샤오광의 실력을 인정하고 그에게 패키지게임을 포기하고 온라인 게임 개발을 하라고 권했다. 당시 온라인 게임은 아직 초기 단계였지만 다이홍은 몇 개의 게임 아이디를 직원에게 제공하여 그들에게 온라인 게임을 경험하도록 했다. 이 과정에서 야오샤오광은 온라인 게임의 매력을 본격적으로 느끼게 됐다.

북극빙에서 프로그래밍 담당자는 현재 전정수마(天晴数码 TQ Digital Entertainment)의 부총재 천청(陈承)이였다. 야오샤오광은 그의 재능에 감탄하여 더 열심히 온라인게임 개발을 학습하기로 결심했다. 북극빙에서 일하는 동안 그는 매월 1,000위안의 학비를 지불하고 각종 트레이닝에 참가하는 등 개발 능력을 쌓는 데 주력했다.

하지만 북극빙의 게임 개발도 자금 문제로 중간에 중지됐다. 이후 그는 천청의 추천으로 패키지 게임 개발사 촹이페이샹(创意鹰翔)에서 잠시 일하게 된다.

# 야오샤오광의 첫 번째 온라인 게임 <환령유협>

하지만 이미 패키지게임 개발에 흥미를 잃은 그는 촹이페이샹을 떠나고 바로 온라인 게임 개발을 하기로 결심했다. 다음 해 야오샤오광은 복건성 복주의 전청수마의 개발자로 입사했다. 당시 <만왕지왕>과 <스톤에이지> 등의 성공으로 중국 내 온라인 게임 시장이 형성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그러나 중국 자체 기술로 제작한 온라인 게임은 <천하> 단 하나뿐이었다.

전정수마의 개발팀은 구성되었으나 프로그래머가 부족했다. 야오샤오광은 노동절 연휴에 북경에 와서 전 동료인 천홍잔(陈宏展)을 스카우트 하는 데 성공한다. 이제 그들은 온라인게임 개발에 처음 들어선 셈인데 막상 무엇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전정수마 총재인 유덕건(刘德建)은 우선 테스트용 데모 모델을 만들어 게임개발 기술을 테스트해보기로 했다. 이 모델의 이름은 바로 ‘채색 강호(彩色江湖)’였다.

일여 년의 시간을 거친 후 전정수마는 <환령유협(幻灵游侠)>을 서비스하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몇만 명의 동시접속 유저를 확보하는 성공을 이룬다. 이 게임은 넷이즈가 비슷한 시기에 출시한 <대화서유>를 압도하는 대단한 성적이었다. 개발팀 리드였던 야오샤오광은 당시 매월 3만 위안의 보너스를 받지만 넷이즈의 <대화서유> 개발팀은 1만 위안의 보너스를 한번 밖에 받지 못했을 정도로 두 게임의 초반 성적은 큰 차이가 났다.

물론 이 성적은 야오샤오광이 회사를 떠난 후 금방 역전이 되었지만 말이다.

# 자유를 위해 떠나다
중국 IT기업 텐센트의 계열사 티미의 대표 개발자 야오샤오광. 디스이즈게임 제공.

돈은 벌었지만 자유를 느끼지 못한 야오샤오광은 그 후 회사를 떠나 베이징으로 돌아갔다. 그는 촹이페이샹(创意鹰翔)의 천청, 장샤오밍(张晓明) 등과 함께 치완싱(全星)스튜디오를 설립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블랙 온라인> 개발을 시작했다. 이 게임의 개발을 위하여 야오샤오광은 모든 돈을 투자했고 당분간 수입이 없는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개발비용은 그가 상상했던 것보다 많이 들어갔고 설상가상 인력까지 부족해서 그는 모든 프로그램을 혼자서 완성해야만 했다. 그는 이 시절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다고 회고한다.

2002년 <블랙 온라인>은 테스트 단계에 들어섰고 서버에는 4,000명의 동시접속 유저가 들어왔지만 야오샤오광은 2D 기술과 재미에 한계를 느끼고 3D 기술연구로 방향을 틀게 된다. <선지(神迹)>의 3D 기반은 이때부터 갖추게 됐다.

2003년 2월 야오샤오광은 자신이 직접 개발한 3D 엔진으로 샨다(盛大)에 합류해서 프로젝트 <선지>의 총책임자가 됐다.

<미르의 전설>이 중국 시장에서 큰 성공을 거둔 후 한국과의 지적재산권 갈등 문제가 불거졌다. 이때 천티엔차오(陈天桥)는 자체 지적재산권의 중요성을 느꼈고 야오샤오광과 함께 <선지>를 제작하게 됐다. 하지만 <선지>가 서비스를 시작한 후 야오샤오광은 입원하여 두 차례의 다리 수술을 받게 된다. 2004년 야오샤오광은 건강 문제로 휴직을 했고, 그 시기에 많은 책을 읽었다. 심지어 그 시기에 <온라인 게임개발서>을 집필하여 많은 젊은 게임 창작자들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는다.

# 텐센트의 삼고초려 그리고

2005년 건강을 회복한 야오샤오광은 다시 일을 시작했다. 이때 텐센트의 부총재 탕이(唐毅)는 야오샤오광을 텐센트에 스카웃하려 했는데 야오샤오광은 거절했다. 그러나 텐센트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야오샤오광에게 러브콜을 보냈고 마침내 야오샤오광은 2008년 텐센트에 입사했다. 그가 텐센트에서 시도한 첫 번째 작품이 바로였다.

텐센트의 로고. 디스이즈게임 제공.

이전 텐센트의 게임 업무는 공급 위주였고, 히트한 자체 개발 게임이 없다는 것이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 약점을 를 통해 극복했다. 처음으로 텐센트의 자체 개발한 게임 중에서 성공한 게임이 된 는 2008년 1월 시험가동에 들어갔는데 10일 만에 동시접속자 30만 명을 돌파했다. 아울러 2012년 8월에 이르러서는 동시접속자가 300만 명을 돌파하는 등, 당시 텐센트가 자체 개발한 게임 중 유일하게 동시접속자 100만을 넘긴 게임이었다. 사실은 <카트라이더>를 모방한 작품이지만 말이다.

2012년 6월 야오샤오광이 책임진 린랑천하(琳琅天下)스튜디오는 <어룡재천(御龙在天)>을 출시했고 그해 최고 동시접속자는 50만 명을 돌파했다. 야오샤오광의 와 <어룡재천>은 텐센트의 자체 개발 게임 부문에 큰 자부심을 심어줬다.

# ' 위챗(Wechat)' 플랫폼의 힘

2012년 텐센트의 위챗은 이미 2억 명의 사용자를 확보했다. 텐센트의 마화텅은 “인터넷 모바일 분야에서 가장 먼저 대규모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분야가 모바일 게임이다”라고 말했다.

당시 텐센트의 <어룡재천>은 성공을 거두었지만, 웹게임 사업의 실패와 모바일게임 <워짜오MT2(我叫MT2)>의 실적 부진으로 내부에서 위기감을 느끼고 있던 시절이었다.

텐센트의 COO 런위신(任宇昕)은 웹게임처럼 개방 플랫폼 모델을 사용하지 말고 자체 개발에 힘써야 한다고 말했고, 그래서 텐센트는 5개의 프리미엄 게임 개발을 목표로 정했다. 총책임자는 당연히 야오샤오광이었다. 당시 텐센트에는 모바일게임 개발의 경험을 갖춘 팀이 아예 없었다. 야오샤요광은 상하이의 텐센트에서 모바일 게임을 연구하지만 완성된 제작 경험이 거의 없는 팀을 인수하여 천미예유(天美艺游) 스튜디오를 설립했다.

2013년 8월과 9월 천미예유는<텐텐아이샤오추(天天爱消除)>와 <톈톈쿠파오(天天酷跑)>를 출시했다. 사실상 한국의 <애니팡>과 <윈드런너>를 그대로 벤치마킹한 게임인 이 게임들은 당연히 큰 성공을 거두었다. <텐텐아이샤오추(天天爱消除)> 출시 10일 만에 유저규모가 4,000만 명을 돌파했고, DAU가 2,500만을 돌파했다. 물론 위챗 플랫폼의 힘이었고 야오샤오광은 소셜 플랫폼의 강력함을 새삼 인식하게 된다. 이후 천미예유는 텐텐 시리즈로 다양한 모바일 게임을 출시했다.

# 2억 명이 플레이하는 게임 <왕자영요>의 탄생기

2014년 10월 텐센트인터랙티브엔터테인먼트는 조직의 구조조정을 시작했고 기존 8개의 스튜디오를 천미(天美), 광자(光子), 모팡(魔方), 북극광(北极光)으로 합병했다. 각 스튜디오는 독립적으로 게임의 개발 및 운영을 책임지게 됐다. 야오샤오광은 이중 천미 스튜디오의 총책임자가 됐다.

그리고 2015년 <왕자영요>가 정식으로 출시됐다. 처음에 출시된 <왕자영요>의 이름은 <영웅전기(英雄战迹)>였다. 2015년 7월 <영웅전기>와 <전민초신(全民超神)>은 동시에 테스트 단계에 들어갔는데 <영웅전기>는 완전한 실패였다. 하지만 <영웅전기>의 가능성을 본 야오샤오광은 원래의 3 vs. 3 플레이 모델을 5 vs. 5로 변경했고 게이머대 환경 대전(PVEㆍPlayer Vs. Environment) 중심의 게임을 전적으로 게이머간 전투(PVPㆍPlayer Vs. Player)로 변경했다. 2015년 10월 <영웅전기>는 <왕자영요>로 이름을 바꾸어 출시됐다.

게임 왕자영요의 메인 화면. 디스이즈게임 제공.

이러한 수정과 변화의 과정을 통해 <왕자영요>의 실적은 <전민초신>을 훌쩍 뛰어넘었으며, 여기에 각종 소셜의 입소문을 통해 큰 인기를 끌기 시작한다. 텐센트 역사상(올 연말을 즈음에는 세계에서 가장 성공할 것이 유력한) 모바일게임으로 재탄생하게 된 것이다.

야오샤오광은 <왕자영요>의 성공으로 텐센트로부터 1억 위안(180억 원)의 특별 인센티브를 받았다. (물론 통 큰 텐센트는 개발팀 전체에 별도의 1억 위안의 보너스도 지불했다.)

# 우리도 훌륭한 게임 개발자들이 있다

엄청난 보너스에도 불구하고 그는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그렇듯 돈에 연연하기보다 자신이 계속 원하는 게임 개발을 하고 싶다고 밝혔다. 사실 그의 과거 개발게임 <텐텐아이쇼추> 등은 그다지 독창적이지 않다. 하지만 그는 잘 만든 게임의 벤치마킹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배워나가면서 좋은 게임을 만드는 데 주력했고, 마침내 모바일 역사상 가장 많은 사용자와 가장 높은 수익의 <왕자영요>를 개발해 냈다. 전적으로 그의 게임개발에 대한 열정에서 비롯된 일이다.

필자 생각에는 한국에도 야오샤오광 못지않은 훌륭한 개발자들이 있다. 중국의 어떤 개발자도 따라올 수 없는 독창성은 한국 개발자들의 독보적인 장점이다. 하지만 그 천재성이 시간이 흐를수록 희석되는 이유는 ‘한국의 게임 개발자들이 개발에만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지지 못한 것 때문'은 아닐까.

디스이즈게임 제공 ▶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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