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한 당신] 이고르 골롬스토크

구소련 출신 영국의 미술사학자 이고르 골롬스토크는 스탈린 체제의 소비에트와 나치 독일,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 미술 작품 등을 비교, 전체주의(적) 예술의 근친성을 "최초로 진지하게 연구"한 학자다. 그는 전체주의 미술은 단순히 예술의 한 장르가 아니라 미학과 이념이 결합한 문화현상이며, 체제 붕괴 이후에도 끊임없이 재생돼 왔다고 주장했다. russianartandculture.com

스페인내전이 한창이던 1937년 5월, 프랑스 파리 만국박람회에 선뵌 히틀러 제3제국과 스탈린 소비에트공화국(구소련) 전시관은 전후 다양한 맥락에서 상징적으로 소비돼 왔다. 양국 전시관은 에펠탑을 원경에 두고 대치하듯 마주 섰다. 소련 전시관은 33년 5월 스탈린의 소비에트궁전 공모에 당선한 건축가 보리스 이오판의 작품. 그는 피라미드형 마천루 위에 레닌 석상을 얹으려던 ‘궁전’ 디자인을 차용, 지붕 위에 레닌 대신 조각가 베라 무히나(Vera Mukhina, 1889~1955)의 거대 강철 작품 ‘노동자와 콜호츠 여성’을 세웠다. 독일관은 베를린올림픽 주경기장 등을 설계한 히틀러의 군수장관 알베르트 슈페어의 작품이었다. 회고록 ‘알베르트 슈페어의 기억’(김기영 옮김, 마티)에 썼듯, 소련관 디자인을 미리 본 그는 더 높은 건물을 짓고 꼭대기에 나치 문장과 독수리 조각을 얹어 소련관을 내려다보게 했다. 독일관을 대표한 조각은 근육질의 두 남성이 손을 잡고 선, 나치 작가 요제프 토라크(Josef Thorak, 1899~1952)의 작품 ‘동지애’였다.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아리안 민족전사라는 두 영웅적 이상이 대치하는 사이, 독일관 뒤편 공화국 스페인관의 벽에는 피카소의 회화 ‘게르니카’가 걸려 있었다. 2년 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41년 독일은 독소불가침조약을 파기하며 소련을 침공했다.(리처드 오브리의 ‘독재자들: 히틀러와 스탈린, 권력작동의 비밀’ 참조)

1937년 파리 만국박람회의 제3제국 전시관(왼쪽 높은 건물)과 소비에트 전시관

1929년 1월 11일 모스크바 북부 트베리(Tver, 옛 칼리닌)에서 태어난 이고르 골롬스토크(Igor Naumovich Golomstock)도 무히나의 저 조각을 보며 성장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Naum Yakovlevich Kodzhak)는 망치를 든 계급 영웅이 아니라 크림반도의 부유한 부르주아 집안 출신 광산 기술자였고, 유대인이었다. 그는 34년 반체제선동 혐의로 5년 강제노역형을 선고 받고 ‘굴라크(강제노동수용소)’로 끌려갔다. 무히나의 조각이 서던 그 해, 8살의 골롬스토크는 어머니를 따라 모스크바로 이주했다. 남부 시베리아 출신의 신경병리학자 어머니(Mary Samuilovna Golomstock) 역시 유대인으로, 소수파인 카라이트(karaite) 유대교를 믿었다. 어머니가 이고르에게 ‘정치범’ 아버지의 성 대신 자기 성을 붙이고 당 중간간부와 재혼한 데는 어린 아들의 출신성분 세탁의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39년, 극동 오지 콜리마(Kolyma) 굴라크의 진료소 근무를 자원한 것도, 꼭 원해서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골롬스토크는 1년의 3/4이 겨울이고 영하 40도가 예사인 그 수용소 마을에서, 온갖 범죄자 및 가족들과 더불어 만 4년을 보냈다. 유년의 그에게 무히나의 조각은 해방의 영웅이 아니라 악몽 속 거인 같았을지 모른다.

미술비평가 겸 사학자로 성장한 골롬스토크가 토라크의 조각을 처음 본 게 언제인지는 알 수 없다. 60년대 초 모스크바 푸시킨 국립박물관에서 근무하던 무렵, 박물관 서가 한 켠에 숨겨져 있던 30년대 말(독소불가침조약 직후의 독소해빙기) 독일 미술저널을 본 게 나치 국가사회주의 미술과의 첫 대면이었다고 한다. 거기 실린 여러 작품들에서 그는 무히나의 환영을 발견했다. 청소년 대상 박물관 교육 프로그램도 맡고 있던 그는 저널의 나치 미술작품 사진을 학생들에게 보여주며 누구 작품인 것 같으냐고 물었더니 주요 소비에트 작가들의 이름을 대더라고 한다. 그는 다시 면밀히 그림을 들여다보라고 했고, 그제서야 학생들은 작품 속 벽에 걸린 초상화 인물이 스탈린이 아닌 히틀러라는 걸 깨닫더라는 이야기.(guardian, 2017.8.2) 당시 독일 저널은 당연히 불법 출판물이었고, 후르쇼프 체제라고는 해도 그의 강의는 충분히 ‘불온’했다. 그 탓인지 어쩐지, 그는 직후 박물관을 떠났다.

골롬스토크가 그의 주저인 ‘전체주의 미술(Totalitarian Art)’을 출간한 건 근 30년 뒤인 1990년이었다. 나치와 스탈린, 무솔리니와 마오쩌둥 체제 미술의 근친성(近親性)을 200여 점의 도판으로 분석한, 가디언에 따르면 “최초의 진지한 연구 저작”이었다. 한나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은 1951년 출간됐다. 거기서 아렌트는 반유대주의와 인종주의, 제국ㆍ민족주의, 무계급 유토피아의 이상이 어떻게 같고 다르며, 또 어떻게 정치를 부정하고 자유를 억압하는지 분석했다. 칼 포퍼는 더 전인 45년 ‘열린 사회와 그 적들’로 두 이념이 사실상 한 뿌리임을 의심케 했다.

골롬스토크의 저서 '전체주의 미술'. 그는 30대의 생각을 60대에 책으로 썼고, 82세이던 2011년 개정판을 냈다. 그가 책 출간을 결심한 데는 전체주의 미술을 한물간 과거로 여기는 연구자들에 대한 반감이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전후 나치는 패망했지만, 나치 예술가들과 미학은 건재했다. 예컨대 미술품 약탈과 “타락한 현대미술” 심판을 진두지휘하던 전 바이에른 국립미술관장 에른스트 부흐너(Ernst Buchner)는 53년 버젓이 복직했다.(telegraph, 2000.4.8) 소비에트 사회주의리얼리즘 역시 스탈린 사후에도 건재했다. ‘전체주의적 요소’들은 국가 지역 체제 이념을 막론하고 냉전 시대의 세계 곳곳에 뿌리내렸고, 관제 예술을 통해 끊임없이 부활했다. 영웅서사를 담은 회화들, 거대 조각들, 행복한 가정과 그 가정을 지키는 자애로운 모성의 이미지, 믿음직한 병사와 건장한 남성 ‘근로 역군’들의 희망찬 표정들, 그리고 지도자의 웅장한 동상들….

골롬스토크로서는 그런 현실이 어이없고 참담했을 것이다. 30대에 직관적으로 알아챈 저 미학적 현상을 연구해 60대에 책을 낸 사연이 그러했을 것이다. 그는 책 서문에 “전체주의 미술은 예술의 (흘러간) 한 장르가 아니라 미학과 이데올로기를 반영한 문화 현상의 하나로 살펴야 한다”고 썼다. 이고르 골롬스토크가 7월 12일 별세했다. 향년 88세.

영어판 일부만 공개된 회고록 ‘한 늙은 염세주의자의 추억 Memoirs of an Old Pessimist’에서 골롬스토크는 “청소년기 학창시절부터 나는 스탈린과 그의 도당인 공산주의청년동맹(콤소몰), 공산당과 소비에트 국가를 증오하기 시작했다”고 썼다. 콜리마 수용소는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톡까지 시베리아 횡단열차로 12일, 다시 증기선을 타고 오호츠크해 나가에보 만(Nagaevo Bay)의 마가단(Magadan)까지 3일, 거기서도 트럭으로 비포장 길 700km를 달려야 닿는 KGB 직영 금광지대. 철조망 너머로 보이는 건 바위와 돌, 거의 1년 내내 눈으로 덮인 황량한 툰드라의 숲이 전부였다. “이따금 침울한 말이 붉은 담요로 감싼 네모난 물건을 실은 수레를 끌고 가는 ‘목가적인’ 장면도 보였다. 봄에 도망쳤다가 얼어 죽은 죄수의 시신을 옮기는 장면이었다.” 어머니가 2년 임기를 마치고 모스크바로 돌아가려던 해에 독일이 소련을 침공했고, 가족의 복귀는 2년 뒤로 미뤄져야 했다.

그는 자신이 다닌 수용소 학교 교사들이 대부분 석ㆍ박사 학위 소지자이거나 대학서 강의하던 정치범이었던 반면 기숙사는 유사 범죄조직 같아서 두목이 있고 졸개들을 있었다는 이야기, 우연히 투르게네프의 소설 ‘봄의 강물 Torrents of Spring’을 읽고 거기 묘사된 자연과 인물들의 일상이 너무 낯설어 놀라웠다는 이야기. 외국 우표를 모으며 다른 세상을 동경했다는 이야기, 모스크바로 돌아온 뒤 욕설과 범죄 은어에 능통한 자기를 보고 친구들이 충격을 받더라는 이야기, 고교시절 친하게 지낸 친구 두 명이 KGB 밀정으로 그를 사찰하고 함께 나눈 대화를 보고했다는 이야기 등을 책에 썼다.

유대교 다수파인 라반파(Rabnanite)와 달리 카라이트 유대인들에 대한 소비에트의 박해는 덜한 편이었다. 하지만 그는 모스크바대학 예술학부에 원서를 냈다가 거부당했고, “원서만 내면 모두 합격하던” 모스크바 금융대학(Financial Institute)에 진학, 49년 졸업했다. 그는 회계원으로 일하며 모스크바국립대 예술사학부 야간반을 졸업했고, 55~63년 푸시킨국립박물관 순회전시팀에서 일하며 건축ㆍ기념물 복원 작업을 했다. (artinrussia.org)

그 무렵 그는 소련작가동맹 회원이자 ‘연방기술미학연구소(VNIITE)’ 선임연구원으로서, 모스크바의 예술가들과 폭넓게 교유했다. 반체제작가 안드레이 시냐프스키(Andrei Siniavsky, 1925~1997)와는 50년대부터 절친한 친구였다고 한다. 둘은 정치범의 아들이라는 공통점 외에도 정치ㆍ문화적 지향을 공유했다.(알렉산더 에트킨드의 책 ‘Wraped Mourning’) 골롬스토크의 1960년 첫 책 ‘파블로 피카소’는 시냐프스키와의 공저였다.

시나프스키는 중편소설 ‘심문’ 등을 유럽서 가명으로 출간했다가 발각돼 작가 유리 다니엘과 함께 65년 8월 재판을 받았다. 러시아문화예술전문사이트 ‘russianart+ culture’에 따르면, 골롬스토크도 세잔과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비평서를 “이데올로기적 이유로” 출간 금지 당한 뒤 익명으로 유럽에서 출간했지만, 어떤 연유인지 골롬스토크는 피고가 아닌 증인으로 시냐프스키의 재판에 불려갔고, 불리한 증언을 거부해 6개월 노역형(벌금형으로 감형)을 선고 받았다. 그리고 72년 브레즈네프 정부가 소위 ‘이민세’라는 걸 받고 유대인의 이민을 허용하자 곧장 영국으로 이주했다. 적지 않은 돈이었다는 이민세의 대부분은 골롬스토크의 피카소 평전을 인상 깊게 본 영국의 초현실주의 화가 겸 비평가 롤랜드 펜로즈(Roland Penrose, 1900~1984)가 댔지만, 모스크바의 친구들도 십시일반 보탰다고 한다. 가디언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아들 예브게니도 “몸값의 100그램 정도는 냈다”고 전했다. 7년 형을 선고 받은 시나프스키도 71년 가석방돼 73년 프랑스로 망명했고, 둘은 유럽서 우정을 이어갔다.

골롬스토크는 영국 BBC의 러시아어 방송을 도왔고, 예술잡지 ‘Continent’와 ‘Syntex’ 등을 창간해 글을 쓰면서 주간으로 일했고, 서방에 덜 알려진 소비에트의 ‘비공인(unofficial)’ 작가 작품 전시를 기획하고 전시하기도 했다. 소설 등 몇 권의 책을 번역했고, 세인트 앤드루스 대학과 에섹스ㆍ옥스퍼드대에서 예술사 강의를 했다. 그는 세잔과 보쉬 비평서 외에도 한스 홀바인과 데미안 허스트의 비평서도 썼다.

그의 회고록은 2011년 러시아어로 출간됐고, 영어판은 내년에 출간될 예정이라고 한다. 그 책 영문판 번역은, 소비에트 반체제 작가 바실리 그로스만(Vasily Grossman, 1905~1964)을 서방 세계에 알린, 골롬스토크의 친구 로버트 챈들러(Robert Chandler)가 맡았다. 그로스만의 대표작 ‘삶과 운명 Life and Fate’은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모티브로 파시즘과 공산주의 정권의 대중 동원과 강제노동, 살상의 참상을 그린 작품. 책은 스탈린 사후 해빙기였던 60년 10월 출판을 시도했다가 KGB에 원고와 타이프라이터 먹지까지 압수당했고, 작가 사후 10년 뒤에야 마이크로필름 사본이 서방으로 전해져 80년 스위스에서 러시아어로 출간됐다. 70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1962)보다 먼저 쓰여진 그 책 영어판은 1985년 출간됐고, 챈들러에게 번역을 종용한 게 골롬스토크였다. 2010년 인터뷰에서 챈들러는 “근 30년 전(러시아어판 출간 즈음) 골롬스토크가 두꺼운 책 한 권을 들고 오더니 대뜸 ‘너 번역가로 출세하고 싶으면 무조건 이 책을 번역해야 해!’라고 하더라”고 말했다. 그는 러시아어 책이라곤 번역은커녕 읽어본 적도 없다며 거절했다고 한다. “하지만 쉽게 물러설 이고르가 아니죠. 몇 주 뒤 자기의 BBC 러시아어방송(Svoboda, Liberty)에서 낭독한 4시간 반 분량의 축약본 원고를 보냈더군요.(…) 그걸 읽자마자 사로잡혔죠.”(tablemag.com) 골롬스토크는 그렇게, 평생 좀체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서 유년 굴라크의 악몽, 그리고 ‘무히나’의 환영과 씨름했다.

체제의 예술가들이 그린 레닌과 스탈린 히틀러 마오쩌둥(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그가 1990년 ‘전체주의 미술’을 쓰고, 2011년 다시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 미술 등을 보완해 개정판을 낼 때의 마음이, 챈들러에게 그로스만의 소설 번역을 종용할 때의 마음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에세이 ‘스탈린시대 문화 연구의 문제점’은 “지노비에프가 썼듯이 스탈린 시대는 이제 과거로써, 평가되고 조롱 받고 경멸 당하고 희화화되지만, 아직 제대로 이해되지는 않았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들(연구자들)은 스탈린 스타일을 동시대 문화의 이질적 요소로 간주하고, 탐구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치부한다.(…) 하지만 그걸 무슨 정신(in terms of spirit)이 아닌 동시대 문화의 총체적 경험의 일부로 본다면 스탈린식 문화는 지금도 여전히 낯설지도 특별하지도 않다.”

충북대 문광훈(독문학) 교수의 ‘전체주의 사회의 잔재’는 벨라루스 출신 노벨 문학상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Swetlana Alexihewitsch)의 작품과 인터뷰 등을 엮어 전체주의에 대해 쓴 멋진 에세이다. 글에서 문교수는 한 작품 제목(‘Secondhand Time, 중고품 시대’)을 두고 알렉시예비치가 한 말을 인용했다. 스탈린을 겪고도 푸틴을 숭배하는 지금의 러시아, 경험을 통해 배우지 못하고 달라지지 않는 현실을 두고 알렉시예비치는 중고품 시대라 표현했다. “우리는 더 이상 그 어떤 새로운 생각도 창출하지 못하는 중고 시대를 살고 있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산 듯한 골롬스토크가 회고록에서 스스로를 ‘염세주의자’라 쓴 까닭이, 알렉시예비치가 말한 중고품 시대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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