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은숙 서울시립교향악단 상임작곡가는 음악을 늘 가까이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준 자신의 '여중시절'이 오늘의 자신을 만들었다고 회상했다. 서울시립교향악단 제공

그런 음악은 처음 들어 봤다. 7, 8세 무렵이었다. 집에 라디오도 전축도 없던 시절, 집안 형편이 넉넉한 친구 집에서 TV에 나오는 외국 영화를 봤다. 배우 잉그리드 버그먼(1916~1982)이 주연으로 출연한 ‘가스등’(1948)이었다. 주인공 폴라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도중 남편 그레고리가 준 약 때문에 정신을 잃고 몽롱해지는 장면, 그때 흘러나온 음악이 강렬하게 박혔다. 너무나 아름다웠다. 하지만 무슨 곡인지 알 수 없었다. 주변에 물어볼 사람도 없었고, 그저 궁금해하면서 2년이 흘렀다.

어릴 적 나는 청소나 설거지 같은 가벼운 일을 하고 어머니로부터 5, 10원씩 용돈을 받았다. 그 돈을 모으다 몇 백 원이 되면 악보를 샀다. 용돈으로 구입한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악보에서 ‘가스등’의 그 곡을 발견했다. 소나타 8번 1악장이었다. 그 순간 클래식 음악에 눈을 떴다. 아주 어렸을 때였지만, 스쳐 지나간 음악이 뇌리에 박힌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다. “누가 쓴 곡이길래 이렇게 아름다울까?”

음악을 듣고 기억했다 몇 년 후 악보에서 기쁨을 발견하기. 학창시절 음악을 접한 방법은 그랬다. 음악을 들을 기회를 준 건 내가 다닌 중학교인 금란여중(현 이대부중)이다. 기독교 학교여서 전교생이 운동장에서 예배를 봤는데, 예배 시작 전 확성기에서 흘러 나온 음악도 내겐 소중했다. 어느 날 너무나 아름다운 음악을 듣고 홀린 듯 기억해 둔 음악이 바흐의 칸타타라는 걸 한참 뒤에 알게 되기도 했다.

음악을 늘 가까이 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운이 좋았다. 교정에서 친구들과 노래를 불렀고, 대강당에서 예배를 볼 땐 피아노 반주를 했다. 제일 좋아한 장소는 학교 음악감상실이다. 한 번 듣는 데 1시간쯤 걸리는 브람스 교향곡 1번을 내리 4번 들은 적도 있다. 내가 하도 음악을 틀어 달라 하니 음악 선생님이 LP판을 갈지 않고 그대로 두신 덕분이다. 독학으로 피아노를 연주하던 나는 그 선생님의 권유로 작곡을 시작했다.

학교가 이화여대 바로 옆에 있어 음악적 자극도 많이 받았다. 1970년대에는 국내에서 콘서트홀이라고 할 만한 곳이 세종문화회관뿐이었다. 예술의전당이 없는 시절이었다. 웬만한 외국 오케스트라는 내한 공연 장소로 이화여대 대강당을 택했다. 대강당 유리문 밖에 귀를 대고 있으면 연주 소리가 들렸다. 추운 가을날 비를 맞으면서 들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의 브람스 교향곡 1번 4악장을 잊을 수 없다.

리허설을 보다 쫓겨난 적도 많다. 피아니스트 백건우 선생님은 1970년대 인기 스타였다. 표를 살 돈이 없어 리허설을 봤다. 공연 관계자가 리허설에 방해된다며 나가라고 했을 때, 백 선생님이 건넨 말은 축복이었다. “여러분, 나가지 말고 앉아 계세요.” 그날 연주한 악단은 스위스 로망드 오케스트라였다. 외국 오케스트라의 풍성하고 기막히게 아름다운 소리, 음반으로만 듣던 환상적인 소리를 직접 들었으니 그야말로 축복이었다.

해외 유수 오케스트라의 음악회뿐 아니라 대학의 졸업연주회와 고등학교 초청연주회도 찾아다녔다. 공짜로 갈 수 있는 음악회도 많지 않았고 음악회 자체가 적었기 때문이다. 연주자들은 40년 전 자신이 뭘 연주했는지 가물가물 할 수 있지만, 나는 당시 프로그램까지 다 기억한다.

음악을 전공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뒤 이화여대 도서관에서 악보를 빌려 봤다. 악보가 귀한 시절 손으로 베껴 가며 공부했다. 교수들이 새로 작곡한 곡을 들여다보며 현대음악에도 귀를 열었다. 큰 맘 먹고 3,000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서울 명동 대한음악사에서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 악보를 샀다. 굴지의 영국 음악출판사 부시 앤드 호크스에서 나온 원본 악보였다. 이 악보를 가졌다는 사실만으로도 자랑스러웠다. “학생이 벌써 이런 책을 사서 보네. 앞으로 열심히 해요.” 격려해 준 사장님도 떠오른다. 나중에 부시 앤드 호크스에서 내 음악을 출판하게 됐을 때의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클래식 음악만 들으며 자란 건 아니다. 음악을 열린 태도로 대했다. 중학생 때 스트라빈스키의 페트루슈카를 처음 듣고 ‘이상하다’가 아니라 ‘클래식에서 듣지 못했던 색깔이라 신기하다’는 인상을 먼저 받을 정도였다. 팝송도 많이 들었다. 돈 매클린, 사이먼 앤 가펑클, 비지스, 퀸, 엘튼 존, 마이클 잭슨, 비틀스… 아바의 ‘댄싱 퀸’은 학교에서 틀어 놓고 친구들과 춤을 출 정도로 좋아했다. 대중음악 작곡을 했더라도 재미있지 않았을까.

금란여중에 가지 않았다면 내가 지금 뭘 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당시 경험들이 작품에 직접 영향을 미쳤는지 입증할 수는 없지만, 양분으로 쌓여 음악으로 나온다는 건 분명하다. 학창시절 나는 바싹 마른 스펀지 같았다.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음악을 완전히 흡입했다. 음악은 마약이나 다름없었다. 사춘기 시절을 버티게 한 힘이기도 했다. 아버지는 병환을 앓다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돌아가셨다.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았던 시절 음악이 없었다면 인생을 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 같다. 나를 키운 8할은 결국 음악이다. 지금 음악을 향한 열정은 어린 시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니 말이다.

<진은숙 서울시립교향악단 상임작곡가의 말을 1인칭 시점으로 재구성했습니다.>

정리=양진하 기자 realh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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