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주 두 아들 갑자기 물러난 뒤
부회장으로 새 부인이 깜짝 취임
창업주 보유주식 전량 증여받고
11개월만에 경영권 완전 장악
회사 독차지 2년 11개월 만에
지분 보유한 사모펀드에 매각
빌린돈 갚고 증여세 납부 등 사용
추후 다시 경영에 나설 가능성
드라마 품위있는 그녀 중 한 장면. JTBC 제공

2012년 8월. 중견 제지회사 영풍제지 주요 주주명단에 당시 44세의 노미정 씨가 이름을 올린다. 노 씨는 그해 2월 영풍제지 부회장에 깜짝 취임한 데 이어 7개월 만에 회사 주식 9만6,730주(4.4%)를 취득하며 회사 경영권 핵심에 누구보다 가깝게 다가선다.

당시 영풍제지는 창업주 이무진 회장(84)의 두 아들이 경영 일선에서 갑작스럽게 물러난 후, 이 회장이 회사에 복귀해 경영을 챙기고 있을 때였다. 회사 경영권 승계 구도에 중요 변화가 생긴 것이다. 2세를 제치고 유력 후계자로 떠오른 노미정 부회장이 누구인지에 대한 재계의 관심도 덩달아 높아졌다. 하지만 영풍제지는 노 씨에 대한 구체적 언급을 꺼렸다. 다만 공시를 통해 두 사람이 특수관계인임(친인척 관계)을 밝히고 있을 뿐이었다.

취재결과 노 씨는 이 회장의 친척이 아니라 법률상의 정식 부인이라는 점이 드러났다. 노 씨가 등기임원과 주요주주 명단에 이름을 올린 2012년 당시, 두 사람 사이에는 태어난 지 3년 된 쌍둥이 남매도 있었다. 이 회장의 장남 A씨와 배다른 쌍둥이 동생들의 나이 차이는 52년에 달한다.

재계 관계자는 “경영을 맡아오던 이 회장 아들들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자마자 그 자리를 차지한 사람이 노미정 부회장이었다”며 “당시 노 씨의 회사 지분율이 높지는 않았지만 그가 이 회장의 부인이라는 것이 알려진 뒤 영풍제지 경영권이 노 씨에게 넘어갈 것으로 예상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말했다.

최근 화제가 된 드라마 ‘품위있는 그녀’와 흡사한 사건이 5년 전 실제로 벌어졌던 것이다.

영풍제지 평택 공장. 네이버 지도
새 부인이 바꿔놓은 회사 운명

영풍제지는 1970년 설립된 후 주로 면방업계에서 쓰이는 ‘섬유봉’과 골판지 상자용 ‘라이나원지’ 등을 반세기 가까이 생산해 온 중견 제지업체다.

라이나원지 시장은 인쇄용지에 비해 시장 규모가 크지 않지만, 경쟁이 심하지 않기 때문에 영풍제지는 수십년 간 안정적인 실적을 바탕으로 꾸준히 사세를 불릴 수 있었다. 회사 규모는 크지 않아도 늘 수익을 내는 회사였기에 제지업계의 부러움을 받는 업체 중 한 곳이기도 했다.

노미정 씨가 등장하기 전 영풍제지는 여느 중견 기업과 다름없는 경영권 승계 절차를 밟고 있었다. 이 회장의 장남 A씨는 상무와 전무를 거치는 엘리트 후계 수업을 받고 2002년 회사 대표에 오르며 경영 전면에 나선다. A씨가 아버지를 대신해 대표이사로 회사를 직접 경영한 기간도 7년에 달한다. 하지만 A씨는 2009년 3월 대표 이사직은 물론 등기 이사직도 내려놓고 회사를 떠난다. 이후에는 자신이 보유하고 있던 회사 지분 3%도 매각하며 회사와 관계를 아예 단절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장남이 물러난 뒤 회사 경영을 맡은 사람은 창업주 이 회장이었다. 경영일선에 복귀한 이 회장은 차남 B씨를 등기 이사에 앉히며 차남에게 후계 수업을 다시 시키는 듯했다. 하지만 B씨도 2012년 3월 임기 만료와 함께 등기 이사직을 내려놓고 회사를 떠나고 만다.

이때 등장한 사람이 노미정 씨다. 노씨는 B씨가 회사를 떠나기 직전인 2012년 2월 등기 이사진에 이름을 올림과 동시에 회사 2인자 자리인 부회장직에 취임한다. 또 7개월 후인 2012년 8월에는 자기 자금 5억원과 우리은행에서 빌린 돈 10억원으로 회사 주식 4.4%를 취득하며 주요주주 명단에도 자신의 이름을 새긴다. 재계의 예상처럼 노 씨의 주식 취득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불과 5개월 뒤인 2013년 1월에는 이 회장이 보유 중이던 영풍제지 주식 전량(51.28%)이 노 부회장에게 넘어간다. 이 회장이 부인인 노 씨에게 자신이 보유한 주식 전량을 증여한 것이다. 이로써 노 부회장은 회사 주요 임원으로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알린 지 11개월 만에 최대주주 자리도 꿰차며 회사 경영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

제지 업계 관계자는 “노 부회장이 유력한 경영권 승계 후보자라는 건 알았지만 그렇게 단기간에 이 회장 지분이 통째로 넘어갈 거라고 예상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며 “당시 언론 보도로 세간의 관심이 쏠리자 지분 증여와 경영권 승계 작업 속도가 빨라졌다는 추측이 업계 안팎에서 나왔다”고 말했다.

통속 드라마 같은 비극적 가정사

노미정 부회장의 등장으로 세간에 밝혀진 영풍제지 가족의 비극적 가정사도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이 회장 장남 A씨 주장에 따르면 노 부회장이 이 회장과 내연 관계를 맺고 자식을 낳으면서 집안의 평화가 급속히 깨졌다. A씨는 이 회장의 부인이던 C씨가 이 회장의 외도와 혼외자식 존재에 충격을 받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밝혔다. C씨는 A씨의 친모는 아니었지만 A씨가 고등학생일 때부터 그를 30여 년 간 그의 뒷바라지 해온 영풍제지 가의 명실상부한 안 주인이었다.

이무진 회장이 70세가 넘은 나이에 얻은 쌍둥이 남매의 존재도 논란이 됐다. A씨는 쌍둥이 남매가 시험관 아기 시술로 태어났다고 밝히며 시술이 불법적으로 이뤄졌다고 주장했다. 시험관 아기 시술은 난임 부부 등을 위한 특수 의료 시술로 기본적으로 부부관계가 아니면 허가되지 않는다. 실제 쌍둥이 남매가 태어난 해는 2009년으로 노 부회장과 이 회장이 혼인신고를 한 2011년보다 2년이 앞선다. 아이들이 태어났을 때 이 회장의 법적인 부인은 C씨였다.

A씨 측은 이에 불법 시술을 한 ‘ㅇ’병원을 고소했고 법원은 병원에 벌금형을 선고했다. 하지만 법원의 판결이 C씨 사망 후 이뤄진 두 사람의 혼인 신고 효력과 노미정 씨에게 넘어간 회사 경영권 등에는 영향을 미칠 수 없었다.

3년 만에 남의 손에 넘어간 회사

2013년 1월 회사 경영권을 장악한 노 부회장은 2015년 12월 영풍제지를 사모펀드에 매각한다. 회사를 독차지한 지 불과 2년 11개월 만이다.

노 부회장은 보유하고 있던 영풍제지 주식 1,122만1,730주(50.54%)를 사모펀드(PEF) 큐캐피탈파트너스가 운용하는 투자목적 회사 ‘그로쓰제일호‘에 매각하고 회사경영에서 손을 뗀다. 매각가는 650억원에 달했다. 노 부회장은 매각 대금으로 회사 주식을 취득하느라 빌렸던 차입금 상환과 증여세 납부 등에 사용한 것으로 전해졌다.

노 부회장이 회사를 경영하는 동안 회사 실적 성적표는 신통치 않았다. 그가 경영일선에 나섰던 2012년 1,134억원을 기록했던 회사 매출은 해마다 줄어 2015년 767억원으로 32.3% 감소했다. 같은 기간 영업이익도 165억원에서 21억원 적자로 전환을 하고 말았다. 하지만 사모펀드가 인수한 영풍제지는 1년 만에 매출을 100억원 가까이 늘리며 다시 흑자전환에 성공한다. 제지업계가 노 부회장의 경영능력 부족을 거론하는 이유다.

지난 14일 공개된 영풍제지 반기보고서를 보면 이무진 회장 일가 중 회사 주요주주로 이름을 올리고 있는 사람은 노미정 부회장이 유일하다. 노 부회장은 지난해 말 기준으로 영풍제지 주식 3.9%를 보유하고 있으면서, 이 회사 최대주주인 그로쓰제일호 투자목적회사 지분도 34.48% 가지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노 부회장은 지분 매각 후 개명한 것으로 안다”며 “사모펀드와 계약 조건에 따라 노 부회장이 다시 경영에 나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민재용 기자 insigh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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