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30일 문재인 대통령과의 미국 순방중 백악관내 블레어 하우스에서 강경화 외교부장관이 컵라면과 나무젓가락을 들고 있다. 청와대 트위터.

가짜미소 감별법이 있다. 눈은 그대로인 채 입꼬리만 올라가면 진짜 미소가 아니라는 것이 어느 영국 심리학자의 지론이다(관련영상).

그러나 굳이 감별해보지 않아도 지난 6월 미국 순방 중 백악관에서 컵라면과 나무젓가락을 들고 있던 강경화 외교부장관의 미소가 진짜라는 것을 모를 사람은 없을 것이다. 모름지기 한국인이라면 밤샘작업 도중 짬을 내서 후루룩 마시는 따끈한 라면국물의 행복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야근하는 직장인도, ‘야자(야간자율학습)’하는 고등학생도 다 아는 그 맛이다.

59년 전인 1958년 8월 25일 일본에서 인스턴트 라면이 세상에 처음 나왔다. 우리나라에 라면이 등장한 것은 그로부터 5년 뒤인 1963년. 이후 라면은 영혼을 달래는 ‘소울푸드’로 불릴 만큼 한국인의 삶에 없어서 안 될 존재가 됐다. 2015년 세계라면협회(WINA)가 전세계인의 1인당 라면 소비량을 조사한 결과 한국인이 단연 1등이었다. 우리는 매년 평균 1인당 76개의 라면을 끓여먹는 공인된 ‘라면인류’다.

주머니 가벼운 사람이라면

라면을 발명한 일본 니신식품의 창업주 고 안도 모모후쿠와 국내 최초 라면인 ‘삼양라면’을 만든 고 전중윤 삼양식품 명예회장. 두 사람의 라면개발을 이끈 힘은 모두 가난이었다. 안도는 자서전에서 ‘(제 2차 세계대전) 전후 가난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보고 간편식을 고민하다 라면을 만들었다’고 밝혔다. 전 명예회장 역시 1960년대 초 서울 남대문시장을 지나다 사람들이 5원짜리 꿀꿀이죽 한 그릇을 사먹고자 길게 줄을 선 것을 보고 식량 자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라면에 승부를 걸었다.

첫 출시 당시 한 봉지에 10원이었던 라면은 1980년대 100원, 1990년대 450원, 최근 800원대까지 올랐다. 하지만 라면은 여전히 주머니 가벼운 자들을 구원하는 음식이다. 800원에 얼큰함과 개운함, 배부름까지 모두 안겨주는 가성비 좋은 음식이 또 어디 있으랴. 직장인 김성은(30)씨는 “취업준비와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던 시절 돈과 시간을 아끼려고 종종 굶었는데 어느 날 친구가 취업도 다 먹고 살자고 하는 것이라며 라면을 끓여줬던 것이 잊을 수 없는 추억”이라고 말했다.

어디서든 먹을 거라면

수 십년 동안 이 땅에 라면인류를 늘린 라면의 비결은 저렴한 가격, 간편한 조리법이다. 집, 학교, 직장은 물론 한라산 정상부터 유럽의 유명 관광지까지 한국사람이 있는 곳에 라면냄새가 풍기지 않는 곳이 거의 없다. 물이 없어도 괜찮다. 면을 부셔서 스프를 뿌린 ‘라면땅’을 먹는 방법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생존기술이 아니던가.

라면 전문 블로거 지영준씨. 본인 제공.

‘라면정복자피키’라는 필명으로 라면전문 블로그를 운영하는 대학생 지영준(28)씨는 군대에서 라면과 가까워졌다. 고달픈 군 생활, 밤새 눈을 치운 뒤 전우들과 함께 먹었던 컵라면이 정말 꿀맛이었다고 기억한다. 그 후 군복무의 심심함을 달래려고 계속 라면을 먹다가 라면 맛을 평가하는 취미를 갖게 됐다. 지금까지 그는 국내외 라면 447종을 먹고 평가했다.

지씨 역시 간편함을 라면의 최대 강점으로 꼽았다. 그는 “한국사람에게 라면은 언제 어디서든 만날 수 있는 편한 친구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 출출한데 딱히 먹을거리가 떠오르지 않거나 그저 입이 심심할 때도 라면은 늘 기대를 져 버리지 않는다. 더욱이 짜장면 짬뽕은 물론 비빔면, 떡볶이까지 한국인이 사랑하는 온갖 종류의 음식이 모두 ‘라면화’ 됐으니, 라면은 자주 봐도 질리지 않는 친구다.

‘나도 요리사’ 라면

그럼에도 한국인은 라면에 양가감정을 느낀다. 라면의 태생적 한계, 한 끼 식사로 치기에는 조금 아쉬운 영양 때문이다. 라면 열량은 개당 약 500kcal로, 성인남성의 한 끼 권장 열량에 준한다. 하지만 단백질, 비타민이 부족하고 나트륨은 많은 편이다. 즉 먹으면 배부르지만 건강해지지는 않는 셈이다. ‘라면으로 끼니 때우지마’라는 엄마들의 잔소리가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한국인들은 이 단점을 김치와 계란, 치즈, 만두 등 열거하기도 힘들 만큼 다양한 종류의 재료들을 곁들여 극복했다. 때문에 ‘부엌에 가면 무엇인가 떨어진다’는 경고에 평생 비밀스럽게 물을 끓이던 할아버지도, 라면 요리계에 입문한지 얼마 되지 않은 청소년들도 모두 각자 독특한 조리법을 하나씩 갖고 있다. 직장인 박승훈(50)씨는 “자녀들의 끼니를 챙겨야 할 때면 할 줄 아는 게 없어 라면을 끓여준다”며 “아이들 입맛과 건강을 생각하다보니 실력이 늘어 TV에 나오는 꽃게라면도 손쉽게 만든다”고 말했다.

2010년 이후 ‘꼬꼬면’ 과 ‘짬짜면’이 등장하면서 라면업계에 ‘모디슈머’(완성 제품들을 섞어서 독특하게 재창조하는 소비자)가 대세로 떴다. 하지만 알고 보면 한국인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라면 요리사이자 ‘모디슈머’ 였던 셈이다.

[기타리스트 김도균의 라면 비법 레시피 ‘곰탕누들’]

함께라면

현재 시중에서 판매 중인 라면은 약 200종. 여기에 끓이는 사람들마다 다른 조리법을 더하면 라면 맛은 무한대로 확장된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가장 맛있는 라면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먹는 라면일 것이다. 국내 최대 라면동호회인 다음카페의 ‘라면천국’ 회원 4만8,000여명은 이를 잘 안다. 1999년 카페 등장 직후에 회원들은 만나서 함께 라면을 끓여먹고 라면 맛집을 찾아다녔다. 그러다가 누군가 ‘이 맛있는 것을 우리끼리만 즐기지 말고 좀 나눠보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그렇게 2002년 서울 종로의 탑골공원을 찾아 ‘아라봉(아름다운 라면 봉사)’을 시작해 15년간 봉사활동을 각 지역에서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지난 5월 대구에서 다음카페 '라면천국'의 회원들이 '아라봉(아름다운 라면 봉사)' 100회를 기념하는 행사를 하고 있다. 최용민씨 제공.

21년차 라면 개발자이자 카페지기로 ‘덕업일치(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것)’를 이룬 최용민(48) 팔도 광고팀장은 “카페 회원들 사이를 더 끈끈하게 만든 것은 사실 라면이 아닌 나눔”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라면 봉사를 시작하면서 동호회 모임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도 너도나도 연락을 주기 시작했다”며 “함께 나누는 덕에 보람도 느끼고 행복을 느낄 수 있으니 라면은 결국 삶 그 자체인 것 같다”고 강조했다.

신혜정 기자 arete@hankookilbo.com

자료조사 DB콘텐츠부 박서영 soluck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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