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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 칼럼] 여성이 겪는 ‘이름 붙일 수 없는 병’

입력
2017.08.16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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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민음사, 2017)은 흔한 대졸자 ‘경단녀(경력단절 여성)’의 전형을 묘사한 훌륭한 사회학적 보고서다. 홍보대행사에 다녔던 김지영은 서른네 살에 ‘맘충’이 되어 정신병원을 들락거리게 되는데, 그녀를 진찰한 정신과 의사 정대현은 김지영을 가리켜 “산후우울증에서 육아우울증으로 이어진 매우 전형적인 사례”라고 말한다. 이런 편협한 병명에 따라 김지영은 “모성애라는 종교”를 저버린 비정한 엄마가 된다.

산후우울증이나 육아우울증을 앓고 있는 여성에 대한 주위의 인식은 두 가지로 나뉜다. ⓐ그런 병을 앓다니, 모성을 포기한 거다. 악마다. ⓑ그러니까 사회가 여성의 본성(모성)을 지켜주기 위해 여러 가지 제도로 출산 여성을 배려해야 한다. ⓐ와 ⓑ는 보수주의와 진보주의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 같지만, ‘모성’을 여성의 본성으로 전제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얼핏 보기에는 ⓐ가 더 나빠 보이지만, 망가진 사회를 수리하면 훼손된 여성의 본성을 되찾을 수 있다는 ‘타락-회복’ 서사에 기댄 ⓑ도 나쁘기는 마찬가지다. 이들은 여성을 보호하는 체하면서 이상적인 사회를 유지하는 임무를 은근슬쩍 여성의 본성에 전가한다. 이제 둘 다를 뿌리치고 새로운 항을 요청해야 한다. ⓒ산후우울증과 육아우울증이 있다는 것은 모성이 여성의 본성이 아니라는 증거가 아닌가. 모성이 본성이라면 애초부터 산후우울증과 육아우울증이 생겨날 리 없다. 모성은 근대 산업사회의 사회적 구성물이다.

작중 남성 정신과 의사의 진단은 틀렸다. 김지영이 앓는 병의 정확한 이름은 딸로, 연인으로, 아내로, 어머니로 열심히 살았던 여성 주부에게 찾아오는 ‘이름 붙일 수 없는 병’이다. 이 역설적인 병명은 베티 프리단이 1964년에 출간한 ‘여성의 신비’(평민사, 1978)에 처음 나왔다.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으로서의 성숙을 회피하도록 격려 받은 사회에서 경력이 단절된 많은 여성들이 이 병을 앓는다. 예컨대 정대현의 아내가 그랬다. 그의 아내는 남편보다 더 능력 있는 의사였으나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가 주의력 결핍 과잉 행동 증후군(ADHD) 증상을 보이자, 안과 전문의를 포기하고 전업주부가 된다. 이후 아내는 초등학생용 수학 문제집 풀기에 집착하는 괴벽을 보인다. 수학의 세계에서는 모든 답이 하나이지만, 남성 중심주의 사회에서는 성별에 따라 그 답이 달라진다. 이것이 중년여성을 침식하는 이름 붙일 수 없는 병의 원인이다.

이 병에 걸린 한국 문학사 속의 30대 여주인공들을 한데 모으면 정신병동 한 동을 채울 수 있을 정도이지만, 20대 여성은 아직 이 병을 모른다. 김지영에게 “배불러 지하철 타고 돈 벌러 다니는 사람이 애는 어쩌자고 낳아?”라고 타박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여대생이었다. 진취적이고 야망이 드높은 20대 여성일수록, 자신의 젠더를 억압한다. 여성이라는 것을 자인하는 것은 이 사회의 낙오자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 되기에 그들은 그것을 될수록 지연하려 한다.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여성 망명정부에 대한 공상’(현실문화연구, 1995)에서 페미니스트를 멀리 했던 자신의 대학생 시절을 이렇게 회고했다.

“학생이든 아니든 젊은 여성들은 이 남성지배적 사회에서 가장 대우받은 집단이다. 우리는 여성들을 급진화시키는 인생의 쓴맛을 아직 경험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즉 임금노동자가 되어 여성이 어떻게 대우받는지를 알고, 결혼이 평등한 관계가 아니라는 걸 깨닫고, 아이들을 키우며 혼자서 책임을 도맡고, 아직은 남성보다 여성에게 더욱 큰 짐으로 다가오는 노년의 세월을 겪어보지 못한 것이다.”

‘82년생 김지영’의 주인공은 단독자도 아니고 고유명도 아니다. 작중 김지영은 여성이라는 집단적 주인공을 대표한다. “김지영 씨는 한 번씩 다른 사람이 되었다. 살아 있는 사람이기도 했고, 죽은 사람이기도 했는데, 모두 김지영 씨 주변의 여자였다.” 남성 정신과 의사는 소설의 끄트머리에 느닷없이 나타나, 김지영에게 산후우울증과 육아우울증이라는 병명을 투척함으로써 여성에게 모성이라는 구속복을 입혔다. 작가는 이 용수를 뒤집어쓸 것인가를 김지영들에게 묻는다.

장정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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