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맘충’이란 말이 있다. 엄마를 뜻하는 영단어 ‘맘’에 벌레 ‘충’ 자를 붙였다. 카페, 식당, 기차와 같은 공공장소에서 아이를 방치하거나 아이를 앞세워 공짜 서비스 등 무리한 요구를 하는 육아 여성을 멸시하기 위해 만들어진 말이다.

이 말은 요 몇 년 사이 널리 유행해 이제는 유력 언론의 카드뉴스에까지 진출했다. 물론 신체, 재산상의 피해를 일으키는 행동은 비판 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이 단어는 불량한 일부 행동만을 문제삼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저 엄마가 우는 아이를 달래지 못했다는 이유로, 주위가 산만한 아이를 통제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사소한 서비스를 부탁했다는 이유만으로 이 단어를 입에 올리곤 한다.

이 단어는 이처럼 오용될 뿐 아니라, 엄마라는 집단을 뭉뚱그려 지칭함으로써 모든 엄마들을 옥죈다. 이 멸칭을 듣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단속하고, 아이가 방해라도 되지 않을까 주위의 눈치를 보게 되는 것이다. 아이를 키우는 건 힘들 뿐 아니라 언제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를 일이라서 토로하지만, 옛날에는 아이 서넛도 너끈히 키우지 않았냐는 대답이 돌아올 뿐이다.

아니다, 그게 아니다. 아이를 키우는 것은 엄마만이 아니었다. 아기의 수면시간은 불규칙하고, 밤새 깨면서 울고 보챈다. 그 다음에는 분리불안이 생긴다. 부모가 잠시만 없어도 난리가 난다. 걸음마와 동시에 사고를 치기 시작한다. 이 모든 것을 엄마 혼자 돌본다는 건 불가능하고, 가족과 이웃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 요즘 엄마가 인내심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니라, 아주 오래 전부터 늘 그랬던 일이다.

영유아기가 지나면 양육이 끝나는 것도 아니다. 하루 종일 엄마의 손길을 갈구하진 않겠지만, 여전히 돌봄이 필요하고 가르침이 필요하다. 초등학생 지만이는 엄마가 공장 나가고 없는 집에 혼자 있길 무서워했다. 그래서 학교가 끝나면 매번 승환이네 집으로 갔다. 그럼 승환이네 엄마는 주방으로 들어가 찌개를 덥혀 뚝딱 한 끼니를 차려 주었다.

승환이네 집 선영 누나는 승환이는 물론이고 동네 친구 신혁이, 지만이까지 챙기는 원더우먼이었다. 지만이가 몰래 오락실에 갈 때면 그 얘기가 승환이를 통해 선영 누나에게 전해지고 다시 지만이 어머니에게까지 전해졌다. 그날 지만이는 회초리를 맞았다. 지만이가 어른이 되기까지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함께 했다.

물론 그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다. 가족과 이웃의 선의에 기대야 하는 구조는 바람직하지도 않다. 하지만 여전히 누군가는 승환이네 엄마 대신 밥을 해 주고, 선영 누나 대신 지만이를 챙기고 훈육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공공의 몫이다. 어린이집과 유치원은 더 늘어야 하고, 육아휴직을 실질적으로 보장하는 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 제도뿐 아니라, 아이들을 배려하는 문화도 함께 자리 잡아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국공립 어린이집 비율은 6~7% 수준이고, 누리과정 예산 문제로 보육대란이 벌어진 것이 바로 작년 일이다. 육아휴직은 명목상으론 존재하는데 언감생심 꿈도 못 꾼다. 모유수유는 여전히 높은 벽이고, 남자화장실에서 기저귀 교환대를 찾아보기란 하늘의 별 따기다. 우리 사회는 아직 승환이네가 하던 역할을 제대로 못 하고 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맘충’이란 말로 엄마들을 옥죄는 것일 리가 없다. 우리는 대신 육아는 원래 한 사람의 힘만으로 해낼 수 없는 것임을, 예부터 가족과 이웃의 도움이 있기에 가능했던 것임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그 이해 위에서 더 진보해야 한다. 엄마의 몫이듯 아빠의 몫이어야 하고, 우리 모두의 손이 거기 보태어져야 한다. 그런 인식 위에서 비로소 공공의 역할이 뿌리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아이 하나를 키우는 데는 온 마을이 필요한 법이다. 책임을 지지 않고 있었던 건 우리들이다. 그 엄마들의 잘못이 아니다.

임예인 슬로우뉴스, ㅍㅍㅅㅅ 편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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