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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필의 제5원소] ‘비밀의 숲’과 인공지능 검사

입력
2017.08.01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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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에 숱한 화제를 뿌린 주말 드라마 ‘비밀의 숲’이 막을 내렸다. 현실의 박근혜ㆍ최순실 게이트가 벌려 놓은 판은 ‘비밀의 숲’ 정도가 아니라 ‘비밀의 정글’ 수준이어서 어지간해서는 드라마가 현실을 이기기 쉽지 않은 상황에서, ‘비밀의 숲’은 높지 않은 시청률에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평소 드라마를 즐겨 보는 한 사람으로서 평가하자면, ‘비밀의 숲’은 한국 드라마의 수준을 적어도 한 단계 끌어올린 수작임에 분명하다. 나는 과학을 연구하는 사람이다 보니 드라마를 볼 때도 과학이론과 비교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좋은 드라마는 좋은 과학이론과 많이 닮았다.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필연성을 들 수 있다. 필연성이란 한마디로 말해 꼭 그러해야만 하는 성질이다. 예를 들면 상대성이론은 광속이나 좌표변환, 그리고 중력에 대한 몇 가지 기본가정을 받아들이는 순간 거의 외길로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모습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상대성이론은 이론적 완성도가 매우 높다. 필연성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이론의 내적 일관성이 꼭 지켜져야 한다. 끈 이론에서 시공간이 10차원이어야 하는 이유는 끈 이론의 내적 일관성을 저해하는 요소가 오직 10차원 시공간에서만 모두 사라지기 때문이다.

‘비밀의 숲’도 필연성과 내적 일관성으로 무장했다. 스토리의 한 국면에서 다른 국면으로 넘어가는 과정은 꼭 그러해야만 하는 사건들을 거친다. 실체적 진실을 파헤치는 검사 황시목의 추리과정은 자연법칙을 발견하는 과학자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생각할 수 있는 가능한 모든 가설을 동원해 모형을 만들고, 알려진 사실들과 상충하는 요소들을 하나씩 제거해 나간다. 특히 황시목 검사가 살인범을 지목하는 과정이나, 사진을 여러 장 붙여 놓고 살인범의 배후를 밝혀내는 장면은 누가 보더라도 반론의 여지없이 꼭 그러해야만 하는 트랙을 밟고 있다.

tvN '비밀의 숲'에서 검사 황시목이 추리를 하는 과정. CJ E&M 제공
tvN '비밀의 숲'에서 검사 황시목이 추리를 하는 과정. CJ E&M 제공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했던 주인공 황시목 검사는 어릴 때 뇌수술을 받아 정상적인 인간의 감정을 상당히 잃어버린 사람으로 등장한다. 보통의 사람들과 공감하는 능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좀 심하게 말하자면 감정이 거세된, 일종의 기계적인 검사이다.

기계적인 검사라는 설정이 참으로 절묘했구나 싶은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기승전 연애’라는 한국 드라마의 낡아빠진 공식을 여지없이 파괴하는 데에 이만한 핵폭탄이 있을까? ‘비밀의 숲’은 진부한 연애놀음 없이도 얼마든지 성공적인 드라마가 가능함을 보여주었다. 맥락 없는 연애놀음은 한국 드라마의 적폐이다. 둘째, “대한민국에서 가장 믿을 만한 검사”가 되려면 감정이 없어야 한다. 그래야 이런저런 유혹에 휘둘리지 않을 테니까. 이건 드라마 속에서만 통하는 얘기는 아닐 것이다. 감정이 제거된 기계적인 검사 황시목은 역설적으로 현실에서 왜 검찰개혁이 필요한가를 웅변하고 있지 않은가. 드라마 속에서는 검찰이 키운 ‘괴물’ 이창준이 있었지만, 우리의 현실에는 김기춘과 우병우가 있다.

사법부에 대한 불신도 적지 않다. 며칠 전에는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관련 재판에서 조윤선 전 장관에게 무죄가 선고돼 많은 이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청와대 정무수석과 주무장관을 지낸 사람이 무죄라면 대체 누구에게 어떤 죄를 물을 수 있을지 상식적으로 잘 이해되지 않는다. ‘비밀의 숲’이 남긴 후유증인지, 현실의 법조인에게 자꾸 황시목 검사를 대입해 보는 버릇이 생겼다. 검찰개혁이 문재인 정부의 가장 큰 개혁과제이지만 이른바 ‘판사 블랙리스트’ 사건에서 보듯이 사법부를 포함한 법조계 전반의 개혁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대적 소명이다.

법조계 개혁을 또 하나의 시대적 화두인 4차 산업혁명과 연결시키면 어떨까? 인공지능이든 빅데이터든, 실체도 없이 뜬구름 잡는 4차 산업혁명이 아니라 우리가 직면한 절박한 문제를 가장 적극적으로 해결하는 21세기적인 방식으로서의 4차 산업혁명이라는 관점에서 말이다.

나는 ‘비밀의 숲’이 앞으로 몇 시즌을 계속한다면, 언젠가는 인공지능 검사가 등장해 황시목의 역할을 대신하지 않을까 하고 상상해 보았다. 인공지능은 이미 우리 생활 속에 서서히 스며들기 시작했다. 인간으로서의 감정이 배제된, 기계적인 직무수행자로서의 검사라면 인공지능 검사가 현실의 인간 검사보다 훨씬 더 낫지 않을까? 인공지능의 등장으로 사라질 직업군에 법조계가 이름을 올린 지는 이미 오래다. 미국에서는 지난 2016년 ‘로스’라는 인공지능 변호사가 뉴욕의 대형 로펌에 고용되었다. 위스콘신 주 대법원에서는 인공지능이 분석한 결과를 판결에 활용한 사례도 있다. 우려도 없지 않다. 인공지능이 공부할 법률 데이터에는 우리의 굴곡진 역사가 그대로 반영돼 있을 테니, 그렇게 학습한 인공지능이 얼마나 공정할 것인지 논란이 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현실의 황시목을 더욱 더 응원한다. 다가올 인공지능의 시대를 위해 보다 공정한 데이터를 조금이라도 더 남겨 주길. 힘들더라도 부디 포기하지 말기를.

이종필 건국대 상허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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