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리스트 1심 판결문 보니

대통령의 정치적 판단으로 해석
블랙리스트 범행 지시로 볼 순 없어
“朴, 김기춘과 공범 아니다” 명시
지원금 구체적으로 언급했는데
김기춘 판결과 왜 다르나 비판도
박근혜 전 대통령. 한국일보 자료사진

국정농단 블랙리스트 사건과 관련해 박근혜 전 대통령이 ‘좌파 지원 축소, 우파 지원 확대’를 표방한 자체로는 헌법과 법령 위반이 아니라고 법원이 판단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국정기조 하에서 정책 입안과 실행을 지시한 게 블랙리스트(특정 문화예술계 지원배제 명단) 범행을 지시한 것으로 볼 수 없다고 판단해 논란이 초래되고 있다. 대통령제 하에서 대통령의 절대적 권한과 상명하복(上命下服)의 이행을 감안할 때 형식 논리에 치우친 판단이 아니냐는 지적이 제기된다.

31일 확인된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0부(부장 황병헌)의 김기춘(78) 전 대통령 비서실장 등 블랙리스트 사건 판결문은 이러한 논리에 기초해 “박 전 대통령을 공범 관계로 인정하기에 부족하다”는 결론을 명시했다. 박 전 대통령이 문화ㆍ예술계 지원사업에서 ‘좌파 지원 축소ㆍ우파 지원 확대’를 강조했음을 인정하면서도 지원금을 끊는 구체적 범행의 공범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박 전 대통령이 보수주의를 표방해 당선됐고, 그 성향을 지지하는 국민들을 지지기반으로 삼았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재판부는 박 전 대통령의 공모 관계 여부에 대해 A4 용지 3쪽에 걸쳐 기술하면서 박 전 대통령이 “직간접적으로 개입했을 개연성은 매우 크다”고 짚긴 했다. 문화예술 지원배제 범행 전후로 청와대나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작성된 보고서를 받아 봤고, 참모들에게 직접 지시를 내리기도 했음을 알 수 있다고도 했다. 박 전 대통령이 2013년 대통령 주재 수석비서관회의(대수비)에서 ‘국정지표가 문화융성인데, 좌편향 문화ㆍ예술계가 문제가 많다’는 취지로 발언한 점, 2015년 김상률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에게 고교 은사가 보낸 편지를 주며 “‘창비’ ‘문학동네’ 등 문예지는 예산이 증액됐는데 보수 문예지는 예산이 축소됐으니 이를 해결하라”고 지시했다는 점 등을 재판부는 들었다. 그 해 1월 김종덕 문체부 장관에게 “정치편향적인 것에 지원이 되면 안 된다’고 지시한 점도 인정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박 전 대통령이 김 전 실장의 범행에 승인 내지 지시했다고 보기에는 증거가 부족하다며 김 전 실장을 블랙리스트 정점으로 봤다. 재판부는 “구체적으로 어떤 보고 내용이 어떤 절차와 방식을 거쳐 어느 정도까지 대통령에게 보고됐는지 알 수 없다”고 했다. 아울러 박 전 대통령이 문예지나 건전영화 지원문제, 보조금 집행문제, 종북 성향 서적의 도서관 비치 문제 등을 직접 언급하고 지시한 대목을 두고서도 재판부는 그런 지시 자체가 위법ㆍ부당한 것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이를 두고 서울의 한 형사재판 담당 부장판사는 “평소 좌편향 단체들을 문제 삼은 대통령이 ‘지원금’까지 구체적으로 언급했고, 그를 보좌하는 정점인 비서실장이 불이익을 주는 실행을 한 것인데도 위법 행위와 연결고리가 약하다는 판단에 대해 비판적 잣대를 댈 수 있다”고 지적했다. 대한변호사협회 전 대변인인 노영희 변호사는 “대통령이 지금 드러난 상황보다 더 직접적으로 위법한 지시를 내릴 수가 있느냐”고 반문했다. 형사사건 경험이 많은 또 다른 부장판사는 “대통령 공모와 관련해 구체적 범행 실행에 중요한 기여를 했는지를 따지는 부분(기능적 행위지배)은 재판부 판단 영역이라 박 전 대통령이 피고인인 재판에선 결과가 달라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박영수 특별검사팀 관계자는 “사실관계는 인정했지만 우리와 다른 재판부 판단에 대해 항소하겠다”고 밝혔다.

손현성 기자 hsh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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