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빈 해리스의 '음식문화의 수수께끼' 만나며 음식의 인류학적 의미 깨닫게 돼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이 지난 26일 경기 고양시 탄현동의 한 카페에서 한국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최지이 인턴기자

지금도 생각난다. 어느 날 아침식사를 하며 아내에게 "음식 전문기자가 되겠다"고 말했을 때가. 아내는 "먹고는 살라나"라며 제대로 들으려 하지 않았다. 내게 한심하다는 눈빛을 보내는데 야속하기만 했다.

아내의 마음을 이해한다. 고백하건대 당시에 나는 음식의 '음'자도 모르던 '음식 문외한'이었다. 거기다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었기에 아내의 걱정이 컸을 거다. 아마도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라고 생각했을 듯싶다. 사실은 며칠 밤을 고민해 가까스로 입 밖에 낸 말이었다. 아내는 모를 것이다. 하지만 자신 있었다. 누군가 개척하지 않은 분야를 개발해보고 싶었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무모한 도전이라도.

돌이켜보면 나는 자유주의자 기질이 다분했다. 아니 자유주의자다. 학교나 회사 등 조직문화가 맞지 않았다. 어떤 억압이나 간섭 없이 내가 알아서 해야만 직성이 풀렸다. 그러니 어릴 때부터 학교가 싫었다. 내가 받았던 교육 자체가 혐오스러웠다. 현재 출연하고 있는 tvN '알쓸신잡'에서도 이야기했듯 초등학교 시절부터 체험한 제식훈련(군인에게 절도와 규율을 익히게 하는 훈련)은 내게 학교에 대한 반감만 키웠다. 교무실에 들어갈 때는 "선생님 용무 있어 왔습니다!"하고 말해야 했고, 옴짝달싹 못하고 일렬로 줄 맞춰 앉은 교실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너무 적응이 안 됐다. 어머니가 아침이면 "학교 가라"고 깨우는 소리가 그렇게 고문이었다.

오죽했으면 고3 때 결석일수가 50일이나 된다. 조퇴를 밥 먹듯이 했고 아예 학교를 가지 않은 날이 더 많았다. 마냥 놀러 다니기만 했던 기억이 있다. 수업 시간에도 집중한 적이 없다. 선생님 몰래 교과서 밑에 소설책이나 시집을 꺼내 읽곤 했다. 한 번은 우리 동네에 김동길 연세대 교수가 강연을 오신 적이 있다. 하필이면 주말도 아닌 평일이었다. 당시만 해도 김 교수는 '민주 인사'였다. 당연히 뵙고 싶었다. 몇몇 친구들과 작당을 해서 조퇴를 했다. 그 중 한 명은 조퇴서가 받아들여지지 않아 '담치기'까지 감행했다. 교복 입은 까까머리 학생들이 강연장에 들어서니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건 당연했다. '이 시간에 학교 수업은 안 받고 여길 왔나?’하는 눈빛들이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 당시 난 반항보단 자유주의자 성향이 강했다.

대학에서도 내 기질은 그대로 유지됐다. 신문방송학과에 진학했지만 전공에는 관심이 없었다. 학과 내 연극학회 ‘또아리’ 활동에만 전념했다. 어울리지 않겠지만 무대에 서고 싶어 배우를 지망했다. 경상도 사투리에 잘 생기지도 못한 외모와 무대 울렁증을 극복하지 못해 연출로 방향을 틀었다. 연극하고 공연 보러 다니고 술 마시고. 연극은 내 학교생활의 숨통이자 전부였다. 그러니 미래에 대한 구상 따윈 손톱만큼도 없었다.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은 “음식 전문 기자가 되겠다고 했을 때 지인들에게 비웃음을 당하고 욕만 얻어 먹었다”면서 “마빈 해리스의 ‘음식문화의 수수께끼’를 만나 음식과 인간 그리고 사회로 사고를 뻗어 나갔다”고 말했다. 최지이 인턴기자

그러나 학창시절 품었던 글 쓰는 일에 대한 동경은 남아 있었나 보다. 1987년 창간한 한겨레신문에서 신입기자를 뽑는다는 소식에 지원서를 넣었다. 필기시험을 보기 위해 서울의 한 고등학교로 향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가파른 오르막길에 있던 그 학교에는 들어가보지도 못했다. 아예 가지 않았다. 학교로 향하는 길을 꽉 채운 수많은 삶들이 내 눈에 들어왔다. 그들과의 경쟁에서 이길 자신이 없었다. 내 주제를 너무도 잘 알았다. 그날 남들이 오르던 그 길을 나는 도로 내려왔다. 열심히 살아오지 않았기에 미련이 없었다.

그로부터 얼마 뒤 농민신문사에 시험을 봐 합격했다. 당장 백수이니 '2년 만 일하고 나오자'는 심산으로 입사했다. 그로부터 2년 뒤 내게 커다란 격변기가 찾아왔다. 음식과 관련된 글(기사)을 쓰기 시작했다. 농산물의 생산자 입장이 아니라 소비자, 즉 먹는 사람의 입장에서 들여다보기 시작한 거다. 먹거리에 대한 관심을 그때 가졌다. 이러한 글이 앞으로 전망이 있다고 생각한 건 90년대 초 회사에서 보내준 일본 연수였다.

그 때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도착한 일본에서 내 미래가 결정됐다. 당시 일본은 미국이나 유럽 국가들보다 앞선 경제대국이었다. 일본의 음식문화가 발달한 시기이기도 하다. 호텔에서 TV를 켜면 온통 먹는 프로그램만 나왔다. 지금의 '먹방'이다. 서점에도 음식 관련 책들이 깔려 있더라. 그때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거다!" 우리도 조만간 음식에 주목하는 시기가 올 것이란 강한 예감이 들었다. 그럼 준비하자. 내가 시작해서 닦아나가면 주목 받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던지.

한국으로 돌아와 음식 전문기자가 되어야겠다고 선언했다. 열이면 열 모두 다 비웃었다. "진짜? 말 같지도 않은 소리한다"는 핀잔을 많이 들었다. 대학 친구들도 "삼시세끼 밥 먹기도 힘든데 맛 평가가 왠 말이냐"고 역정을 냈다. 거의 변절자 취급을 당했다. 욕만 무지하게 얻어 먹었다.

본격적으로 음식 공부를 시작했지만 관련 서적과 자료가 너무 부족했다. 음식이 하나의 문화라는 인식조차 없을 때였다. 그 때 가뭄의 단비처럼 미국 인류학자인 마빈 해리스가 쓴 ‘음식문화의 수수께끼’를 만났다. 크기가 작은 책이었지만 엄청난 이야기들이 숨어 있었다. 해리스는 이 책을 통해 인간이 먹거리를 확보하고 맛있다고 여기게 되는 과정을 명쾌하게 설명해 놓았다. 문제는 내가 먹어본 적 없는 서양음식들이 제시된 점이다. 맛을 모르니 글을 이해하는 데 한참 걸렸다. 읽고 또 읽는 수밖에 방법이 없었다.

책은 '생각하기 좋은 음식'이나 '인간이 음식을 선택하는 기준' 등 인상 깊은 해석들이 즐비했다.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들에 눈이 번쩍 뜨였다. 음식에 관한 공부는 '사람은 왜 맛있고 맛없다고 말할까'하는 궁금증으로 커졌다. 인간이 느끼는 행복과 음식의 상관관계를 찾아야 했다. 인류학이 답이었다. 인류학협회에서 나오는 보고서도 찾아봤다. 인류학 연구에는 의외로 음식에 대한 내용이 많이 들어가 있다.

최근 방송된 '알쓸신잡'에서 유시민 작가가 "전라도 음식이 왜 맛있느냐"고 물었을 때 내가 "전라도 음식이 맛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맛있는 것"이라고 답한 적이 있다. 더 설명하진 않았지만 해리스가 말한 내용이었다. 나중에 유 작가는 "전라도에선 라면도 맛있다"고 했다. 결국 내가 한 말을 증명한 셈이다. 맛이라는 건 우리 머릿속에서 만들어진다. 맛은 음식이 아닌 기억에 의해서 기준이 됐다는 논리다. 인간은 수많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맛의 기준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 결국 음식 공부는 인류학을 넘어 사회학, 심리학까지 접근해야 했다.

내가 유명세를 탄 건 김재환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트루맛쇼'(2011) 때문이다. 맛집 소개 프로그램들을 둘러싼 진실을 밝히는 영화였다. 내가 인터뷰에서 말한 내용이 논란을 불렀다. "우리나라의 맛집 방송이 왜 이러느냐?"는 질문에 "방송이 천박한 건 시청자가 천박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겨우 그 정도의 음식이 나오는 식당들에 환호하는 천박한 시청자들로 인해 그런 방송이 만들어진다고 했다. 대놓고 "너희들이 천박해"라고 하니 관객들에겐 충격이었던 것 같다. 안티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음식을 공부하면서 그것을 먹는 인간에 대해 깊이 있게 연구했고, 그러다 보니 한국사회가 보였다. 혹자는 내 정치적 발언을 걱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소신을 밝히는 걸 두려워해선 안 된다. 인간이 행복을 유지하기 위해선 일방이 아닌 쌍방이 교류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행복한 사회다.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의 구술을 1인칭 시점으로 재구성했습니다.>

정리=강은영 기자 kiss@hankookilbo.com

관련 기사

web_cdn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정치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