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장정일 칼럼] <이방인>의 불편한 진실

입력
2017.07.19 14:16
0 0

범죄를 저지르고 글을 써서 유명하게 된 사람이라면, 이 자를 따라올 사람이 없다. 그는 1942년 여름 오후 두 시, 알제리의 해변에서 한 아랍인을 총으로 사살했다. 카인이 동생을 죽인 이유는 양떼를 빼앗겠다는 욕심에서였지만, 이 자는 태양 아래에서 불현듯 무엇인가를 깨달았기 때문에 살인을 했다. 살인죄로 사형선고까지 받았던 그는 출감을 하면서 책을 한 권 쓰는데, 그 책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많이 읽힌 책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가 책을 쓰게 된 맥락, 성공 비결, 그 책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다른 책들, 그리고 각각의 대목에 대한 상세한 주석들까지, 이 책의 성공은 아직까지도 흔들림이 없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책세상, 2010)은 “나에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사형집행을 받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써 나를 맞아주었으면 하는 것뿐이다”라는 뫼르소의 비장한 독백으로 끝난다. 하지만 알제리의 언론인이자 작가인 카멜 다우드는 저 구절이 뫼르소의 사형집행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고 본다. 알제리 출신 프랑스인에 걸맞은 사면과 감면이 있었을 거라는 말이다. 믿기지 않는다면 에드워드 사이드의 <펜과 칼>(마티, 2011)을 보면 된다. “소설의 말미에 나오는 뫼르소가 재판 받는 장면은 순전히 이데올로기적 허구입니다. 프랑스인이 식민지 알제리에서 아랍인을 죽였다고 해서 재판을 받는 일은 없습니다.”

카멜 다우드의 <뫼르소, 살인 사건>(문예출판사, 2017)은 감면된 형기를 마친 뫼르소가 출옥해서 <이방인>을 썼다고 설정한다. 뫼르소가 책을 써서 유명 인사가 된 것을 모르고 있었던 피살자의 동생 하룬은 책이 나온 지 이십 년이 되어서야 그 책을 읽게 된다. 밤을 꼬박 세워 뫼르소의 책을 읽은 하룬은 형의 이름이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에 숨이 막힐 듯한 모욕감을 느꼈다.

“나는 ‘아랍인’이라는 단어를 세고 또 세어봤어. 그 말은 스물다섯 번이나 나왔지만 이름은 찾아볼 수 없었어. 소금, 눈부심, 거룩한 사명을 짊어진 인간의 조건에 대한 성찰만 있었을 뿐이야. 뫼르소의 책은 무사가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에겐 이름이 없다는 사실 말고는 아무 것도 말해주는 게 없었어.”, “재판은 가면무도회, 하릴없는 식민주의자들에 의해 저질러진 악이었지. 무인도에서 만난 어떤 남자가 자기가 그 전날에 ‘금요일’이라는 사람을 죽였노라고 한들 그를 어쩌겠는가? 아무것도 할 게 없어.”, “왜 재판에서는 아랍인을 죽인 것보다도 자기 엄마가 죽었을 때 울지 않았다는 게 더 큰 죄가 됐을까?”, “다들 살인이 있었던 게 아니고 단지 일사병이 있었을 뿐이라는 걸 증명하느라 애를 쓰더군.”

<이방인>을 읽은 평론가와 독자는 뫼르소가 말려든 사건의 전말을 놓고 오랫동안 갑론을박을 벌여왔다. 이를테면 뫼르소의 친구인 레이몽이 동거하던 아랍계 창녀를 손찌검했고, 그녀의 오빠 무사가 레이몽에게 복수하려는 틀 속에 뫼르소가 우연히 연루되었다는 것이다. 하룬은 자신들에게는 여자 형제가 없다면서 <이방인>에 아랍계 창녀가 나오는 것은 작가의 비틀린 정신 때문이라고 말한다. 즉 프랑스를 대표하는 뫼르소의 애인 마리의 순결함과 아랍 여자의 타락을 비교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하룬, 아니 카멜 다우드가 실천하고 있는 것은 <이방인> 다시 쓰기다. 그것은 작중에서 “같은 언어로 쓰되,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기로 설명된다(아랍어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필기를 한다).

비서구ㆍ제3세계 작가들에게 이런 전략을 열렬히 권했던 사람이 에드워드 사이드다. 그는 제국주의 시대에 집필된 서구의 문학 정전은 반드시 제국주의에 대한 의식적 정당화를 작품 속에 감추고 있다고 말한다. 때문에 서구의 문학 정전을 읽을 때는 개개의 작품 속에서 침묵하고 있거나 파탄 난 부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그것을 ‘대위법적 읽기’라고 불렀으며, 서구의 문학 정전을 비서구ㆍ제3세계의 시각으로 ‘다시 쓰기’ 할 것을 권장했다. <이방인>의 경우 이야기 속에서 어떤 발언권도 얻지 못했던 아랍인이 카뮈의 침묵과 파탄에 해당한다.

장정일 소설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