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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월회 칼럼] 평화와 평생 공부

입력
2017.07.17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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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법 식상해진 표현이긴 하지만 나이와 관련된 <논어>의 전문은 이러하다. “나이 열다섯에는 학문에 뜻을 두고 서른에는 바로 선다. 마흔에는 미혹되지 않고 쉰에는 천명을 알며 예순에는 들음의 평정을 이룬다. 나이 일흔엔 마음대로 행해도 법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학문에 뜻을 둔다고 함은 타율적으로가 아니라 각성한 정신을 바탕으로 능동적으로 공부해간다는 뜻이고, 바로 선다 함은 독립적이고 자율적 어른으로 우뚝 선다는 의미다. ‘들음의 평정’ 곧 ‘이순(耳順)’은, 미혹이 무엇인지를 알고 천명을 깨친 후에 도달하는 단계로, 그렇기에 무슨 얘기를 들어도 마음의 평정이 깨지지 않음을 가리킨다. 마흔의 “불혹(不惑)”과 쉰의 “지천명(知天命)”이 앎을 기반으로 일궈가는 경지라면 이순은 그것이 몸과 마음에 온전히 녹아 든 경지를 가리킨다.

생애주기별로 윤리적 목표가 사뭇 근본적이고 고상하며 유기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융통성과 현실 감각이 자못 결여됐다는 비판이 적잖이 야기되어 왔다. 그럼에도 공자는 기회가 닿을 때마다 개인의 일생, 곧 삶의 과정을 몇 단계로 나눈 후 각각의 단계에서 수행해야 할 윤리적 목표와 내용을 제시하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그가 고집스럽고 세상물정을 몰라서가 아니었다. 공자 보기에 사람이 태어나서 성장해간다고 함은, 또 늙어간다고 함은 삶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기에 그랬다. 그저 생물학적으로 성년이 되고 노년이 되어가는 것만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건 동물도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해 윤리적으로 진보하고 성숙해질 때 비로소 인간의 삶이 된다고 봤음이다. 하여 인간다운 삶의 완성은 평생에 걸친 윤리적 실천을 통해서만 가능해진다. 그런데 이러한 해명에도 뭔가 개운치 못하다.

지금 여기만 봐도 그렇다. 나이 스물임에도 그저 기계적으로 공부하고 서른이 돼도 마냥 ‘마마보이’이며 마흔은 고사하고 쉰, 예순이 돼도 천명을 깨닫기는커녕 연신 미혹된다. 그래도 우리들은 나름대로 인간답게 살아간다. 공자의 윤리적 요구가 꽤나 머쓱해지는 대목이다. 그런데 공자도 이를 익히 알고 있었다. 생전에 이미 그는 자기 요구가 비현실적이라는 비난을 듣고 있었다. 그래서 자못 궁금해진다. 안 먹힐 줄 빤히 알면서도 굳이 그런 요구를 일관되게 던진 의도가 말이다.

단서는 우리의 윤리 감각과 공자의 그것 사이에 적잖은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가령 우리는 공부한다는 말과 윤리적으로 산다는 말을 동일시하지 않는다. 공부를 잘하게 되면 윤리적으로도 훌륭해진다고 생각지도 않는다. 그러나 공자는 달랐다. 당연히 그렇게 된다고 보았다. 그에게 윤리의 실천은 곧 공부였기 때문이다.

언젠가 그는 자신을 한마디로 대변하여 “호학(好學)”, 그러니까 공부하기 좋아하는 이라고 했다. 당시 ‘공부하다(學)’에는 ‘본받다’와 ‘깨닫다’는 뜻이 같이 들어 있었다. 이때 본받음의 대상은 좋은 행실이고 깨달음의 대상은 하늘의 도였다. 따라서 호학은 요새처럼 책 읽고 외우고 문제 풀기를 좋아했다는 뜻이 아니었다. 그것은 진리를 배우고 행하는 일체의 활동을 가리켰다. 한마디로 윤리의 실천 그 자체였다. 공자가 일생을 대상으로 행한 윤리적 기획은 개인의 삶 전체를 포괄하는 공부 기획이었던 셈이다. 곧 공부는 평생에 걸쳐 지속돼야 함을 끈질기게 강조했던 것이다.

여기서 공자의 말은 지금 여기의 우리 현실과 긴밀하게 연동된다. 평생 공부는 공자 당시에만 절실했던 게 아니었다. 아니, 남북 간 군사적 긴장이 여전하고 동북아평화체제 구축 같은 시대과제의 해결이 요원한 지금, 그것은 더 한층 절실하다. 공자는 수제자 안회에게조차도 조건 없이 어질다고 한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관중더러는 어진이라고 극찬했다. 그가 중원의 평화를 실현했다는 이유에서였다. 평화의 실현이 국가 차원서 펼쳐지는 어짊의 고갱이였던 셈이다.

절대 다수의 인간은 죽을 때까지 이익을 탐하는 본성을 쉬이 극복하지 못한다. 순자는, 인간은 욕망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어떡해서든 구하려 애쓰게 마련이어서 이를 제어하지 않으면 다툼과 혼란이 야기돼 사회가 해체될 수밖에 없다고 통찰했다. 인간의 이런 본성을 합리적으로 제어하지 못하면 평화의 실현은 언제까지나 난망한 일이 될 뿐이다. 사회를 이루고 사는 한 윤리가, 또 공부가 절대적으로 요청되는 까닭이다.

평화는 굳세게 염원한다고 하여 저절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 자기 욕망을 자율적이고 능동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이를 제대로 발휘할 때 비로소 구현될 수 있다. 동서고금의 역사는 평생에 걸친 윤리적 실천, 곧 평생 공부 없이는 이를 생애 전반에 걸쳐 수행할 수 없음을 분명하게 일러준다. 하여 평화를 희구한다면 평생 공부가 가능하도록 사회적 기반을, 국가적 장치를 마련해가야 한다. 더 좋은 대학과 직장을 쥐기 위한 소모 교육이 아니라 복지처럼 생애주기별로 누리는 교육을 구축해야 하는 시급한 이유다.

김월회 서울대 중어중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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