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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정의 독사만필(讀史漫筆)] 교동도(喬桐島)와 개성(開城)의 추억

입력
2017.07.12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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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일 강화도 서북쪽에 위치한 교동도를 둘러봤다. 교동도는 2~3㎞의 바다를 사이에 두고 황해도 연백군과 접해 있다. 한강 임진강 예성강의 입구에 해당하는 곳이니 한반도 굴지의 요충지임에 틀림없다. 작은 섬인데도 고구려는 고목근현(高木根縣), 신라는 혈구현(穴口縣), 고려는 감무(監務), 조선은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겸 부사(府使) 등을 설치했다. 육지와 격리되어 유배지로도 활용되었다. 연산군(燕山君)을 위리안치(圍籬安置)한 곳이다. 잘 가꿔진 교동향교는 주민의 문화수준이 아주 높다는 것을 증명한다. 드넓은 평야에서는 맛있기로 유명한 교동미를 생산한다.

실향민들이 화개산 기슭에 만든 망향대에서 예성강 하구를 하염없이 바라봤다. 건너편이 개성의 입구인 벽란도(碧瀾渡)이다. 맑은 날은 개성 송악산도 보인다는데, 해무가 가득하여 신기루 같은 것만 아스라했다.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은 세계에 알려진 무역도시였다. 불현 듯 북한 안내원의 열변이 생각났다. “고려시대에는 벽란도에서 개성까지 처마를 맞댄 상점이 즐비하여, 비 오는 날에도 처마 밑 보행로를 따라 비 한 방울 맞지 않고 왕래할 수 있었다.” 딱 9년 전 그와 함께 돌아본 개성의 풍경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나는 2008년 7월 1일 개성을 구경했다. 개성은 서울에서 불과 70㎞밖에 떨어져 있지 않지만 집을 나서서 개성에 들어가는 데 다섯 시간 넘게 걸렸다. 버스를 몇 번 갈아타고, 남북 양측의 출입사무소를 거쳤다. 휴대폰을 맡기고, 달러를 환전했다. 외국에 가는 것보다 더 번잡하고 불편했다. 처음 본 장단역 청사에는 김일성 주석의 사진이 걸려 있고, 그 밑에 ‘영광스러운 조선노동당 만세’라는 구호가 큼지막하게 붙어 있었다.

개성의 초입에 자리잡은 개성공업지구는 2000년 8월 현대아산과 북측 아태ㆍ민경련이 2000만 평을 개발하기로 합의한 후, 2003년부터 1단계 100만 평을 조성하여 2007년 10월 기반시설공사를 마무리했다. 2008년 7월 1일 현재 200여 개의 공장용지가 분양되어 제품생산과 공장건축이 진행되고 있다. 개성공업지구개발사업이 완료되면 개성지역은 35만 명의 북측 근로자와 3만 명의 남측 근로자가 2,000여 개의 기업에서 연간 200억 달러를 생산할 것이란다. 그렇지만 우리 버스에 동승한 북측 안내원은 북측 2800명, 남측 800명이 함께 일하고 있는 정도라고 말했다.

우리를 태운 관광버스는 개성시내를 빗겨지나 곧장 박연폭포(朴淵瀑布)로 향했다. ‘고기’ㆍ‘남새’ 등의 글자가 붙어있는 상점이 더러 눈에 띠었는데, 문은 닫혀 있다. 관광버스 11대가 일렬로 1시간 이상 달렸는데도, 마주쳐 지나가는 자동차는 한 대도 볼 수 없었다. 밭에서 보리를 베던 북측 농민은 모두 등을 돌리고 앉았다. 애써 우리를 외면하니 마음이 편치 못했다. 야산 꼭대기까지 심은 옥수수의 작황은 아주 좋지 않았다. 깊은 산속에 접어들면서 숲이 우거지기 시작했다. 특히 박연폭포에서 관음사(觀音寺)에 오르는 계곡 주위는 산림이 울창했다. 보기 좋은 바위나 절벽에 깊게 새긴 ‘세상에 부럼 없어라’ 등의 구호가 낯설었다.

자남산(子男山) 입구에는 김일성의 거대한 동상이 개성시내를 굽어보며 서있다. 500명을 수용한다는 음식점인 통일관 근처의 건물에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 ‘항일의 녀성 영웅 김정숙 동지를 따라 배우자’ 등의 구호가 아주 크게 붙어 있다. 점심을 들고 숭양서원(崧陽書院), 선죽교(善竹橋), 국자감(國子監), 고려박물관, 개성시내 등을 관람했다. 거리에서 사람의 자취를 거의 보지 못했다. 상점도 민가도 대부분 문을 닫았다. 모두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생산도 학습도 생활도 항일유격대 식으로’, ‘조선은 하나다’, ‘학습제일주의’, ‘심장을 바치자 조국에’, ‘위대한 선군정치 만세’, ‘위대한 장군님만 계시면 우리는 이긴다’, ‘전설적 영웅 김정일 장군 만세’ 등의 구호를 새긴 대형 현수막이 거리를 도배했다.

교동도에서 집에 돌아온 지 하루 만에 북한은 이른바 대룩간탄도미사일을 쐈다. 망향대에서 이상하게 개성의 역사유적은 흐릿하게 떠올랐는데 현란한 구호들은 매우 뚜렷하게 눈앞을 아른거렸다. 감상에 젖지 말고 북한의 본색을 직시하라는 경고였던 셈이다. 오늘은 개성여행 때 지불한 30여만 원의 경비조차 미사일개발에 쓴 것은 아닐까 의심이 들어 하루 종일 께름칙했다.

정재정 서울시립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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