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가 새 바람

지난달 30일 서울 송파구의 한 멀티플렉스에서 열린 영화 ‘불한당’ 특별 상영회에서 주연배우 설경구(왼쪽부터)와 전혜진 임시완 김희원이 관객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100만 관객 못 채워 안타까워”
‘불한당’ 팬들 자발적 상영회
두달째… 티켓 10초도 안돼 마감
배우들도 “이런 경험 처음”
‘아가씨’ 111번 본 관객도 있어
취향 맞으면 격한 애정 쏟아
새로운 팬덤이 영화계에 활력
극장 상영일 짧아진 것도 원인

지난달 30일 서울 송파구의 한 멀티플렉스에서 진풍경이 펼쳐졌다. 영화 상영이 끝나자 600명의 관객들이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기립박수를 쏟아냈다. 박수와 환호는 엔딩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7분간 계속됐다. 영화 ‘불한당’을 되살리기 위해 나선 열혈 팬들의 특별한 의식이다. ‘불한당’은 올해 칸국제영화제에서도 7분간 기립박수를 받았다.

곧이어 주연배우 설경구와 임시완, 전혜진, 김희원이 ‘완전체’로 무대에 등장하자 고막을 찢을 듯 ‘고주파 함성’이 터져 나왔다. ‘형님들 사랑합니다’ ‘비주얼 배우 설경구’ ‘우윳빛깔 김희원’ 등 재기 발랄한 문구가 적힌 플래카드들도 배우들을 격하게 반겼다.

환호성에 둘러싸인 배우들은 상기된 표정으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게 무슨 일이야.” 대기실에서부터 내내 얼떨떨해하던 설경구는 “20년 넘게 영화를 찍었는데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며 감격에 젖었다.

‘블랙’으로 드레스코드를 맞춘 ‘불한당원’들이 ‘불한당’ 상영이 끝난 뒤 기립박수를 치고 있다.
‘불한당’ 상영회에 참석한 배우들은 “평생 이런 경험을 또 할 수 있을까 싶다”며 팬들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설경구도 놀란 ‘불한당’ 팬덤

이날 상영회는 ‘불한당’ 배급사인 CJ엔터테인먼트가 마련한 자리다. 하지만 배급사를 탄복시켜 상영회를 이끌어 낸 건 ‘불한당원’이라 불리는 팬덤이다. 적게는 10번, 많게는 30번 넘게 ‘불한당’을 반복 관람하며 애정을 바친 이들이다. 2박 3일 일정으로 중국에서 온 팬도 있었다. 임시완은 “왜 이 영화를 이토록 좋아하는지 되묻고 싶다”며 감탄했다. 1시간가량 팬들의 날카로운 질문과 애정 고백이 이어졌다. 배우들도 기억하지 못하는 세세한 표정과 눈빛, 각 장면의 숨겨진 의미를 되짚는 질문들이었다.

설경구는 특별히 영화 속 의상을 입고 왔다. 그가 “아직도 안감에는 소품용 피가 묻어 있다”라면서 재킷을 벗어 보여 주자 객석이 자지러졌다. 임시완이 군입대(11일) 하기 전에 DVD 코멘터리 녹음에 참여한다는 소식도 현장을 들썩이게 했다. 직장인 송민지(33)씨는 “영화를 볼 때마다 새로운 의미가 발견되고 궁금증이 생겨서 다시 보고 싶어진다”며 “불한당원끼리는 영화 얘기로 밤을 새울 수도 있다”고 말했다.

‘불한당’은 조직폭력배 재호(설경구)와 위장 잠입 경찰 현수(임시완)의 우정과 배신을 그린 범죄액션 영화다. 5월 17일 개봉해 관객 100만명을 넘지 못하고 일찍 막을 내렸다. 지난달 8일부터 주문형비디오(VOD) 서비스도 시작했다. 그런데 ‘불한당원’들이 영화에 다시 숨결을 불어넣고 있다. ‘영화를 볼 수 있는 곳이 없으면 직접 만들어 보자’는 취지에서 자발적으로 상영회를 열기 시작한 게 벌써 두 달째 릴레이로 이어지고 있다. 한 팬이 이른바 ‘총대’를 메고 상영관을 빌리면 각자 비용을 나눠 참여하는 방식이다. 지난달에는 거의 매일 열렸다. 배급사 주최 상영회가 열리던 시간에도 서울 삼성동의 멀티플렉스에서 팬들이 주최한 상영회가 동시에 진행됐다. 좌석은 대부분 10초도 안 돼 마감된다. 영화를 보면서 대사도 따라 하고 환호성도 맘껏 지르는 ‘응원상영회’도 추진 중이다. 제작사 폴룩스(주)바른손의 안은미 대표는 “영화가 짧게 소비되고 사라져 버리는 요즘 시대에 열성 팬들이 영화 매체의 영속적 가치를 다시 일깨워 줬다”고 말했다.

‘불한당원’들은 상영회 드레스코드를 맞추고, 캐릭터의 특징을 담아 명함, 사원증, 항공권 같은 패러디물을 제작하면서 팬덤만의 놀이문화로 확장해 가고 있다. 불법다운로드 색출에도 힘을 보탠다. 기자가 ‘굿 다운로더’라는 사실을 확인한 뒤 인터뷰에 응한 직장인 최민화(40)씨는 “영화가 흥행에서 저평가된 것이 아쉬워 더 적극적인 행동으로 표출되는 것 같다”며 “오래 걸리더라도 관객 100만명을 꼭 채우고 싶다”고 했다.

‘불한당’ 상영회에 참석한 한 관객이 설경구 응원 문구를 담은 팻말을 들고 있다. 김표향 기자
영화 ‘불한당’ 팬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패러디물. CJ엔터테인먼트 제공
극장가 ‘N차 관람’ 보편화 추세

과거에도 ‘왕의 남자’ ‘지구를 지켜라’ ‘번지점프를 하다’ 등이 ‘폐인’이라 불린 열혈 팬을 양산했지만 극히 이례적인 일부만의 사례였다. 하지만 최근에는 ‘불한당원’처럼 특정 영화에 열광하고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영화 팬덤’이 부쩍 자주 등장하고 있다.

지난해 개봉한 영화 ‘아수라’(감독 김성수)의 팬들은 스스로 ‘아수리언’이라 부르며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영화에 대한 애정을 공유했다. 영화의 배경인 가상도시 이름에서 따온 ‘안남시민연대’라는 이름으로 지난 겨울 촛불집회에도 참여했다. ‘아가씨’(감독 박찬욱)를 사랑하는 팬들은 디시인사이드 ‘아가씨 마이너 갤러리’에 모여 ‘아갤러’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며, IPTV에 공개된 확장판의 극장 재개봉을 성사시키고 각본집과 사진집 발간을 이끌어 냈다. DVD 코멘터리 녹음 현장에 자체 제작 굿즈와 간식거리도 ‘조공’했다. ‘불한당’도 팬들의 빗발치는 요구에 OST 앨범과 블루레이 출시를 준비 중이다. 안은미 대표는 “한동안 영화 시장에서 사라졌던 영역이 팬덤으로 인해 다시 살아나고 있다”며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에게 여러 시사점을 던져 준다”고 말했다. ‘곡성’과 ‘비밀은 없다’ ‘라라랜드’ ‘너의 이름은.’도 온라인을 중심으로 팬덤이 만들어졌던 영화들이다.

영화마다 팬덤의 성격은 조금씩 다르지만, 주요한 공통점은 ‘반복 관람’이다. 이는 영화 소비 행태의 변화와도 관련이 깊다. 일부 마니아 관객에게서 나타났던 ‘N차 관람’(동일 영화 반복 관람)이 점차 보편화되는 경향이 통계로 드러난다. CGV 리서치센터에 따르면 지난해 CGV 회원 티켓수를 기준으로 동일 영화를 3회 이상 관람한 회원은 5만8,392명에 달했다. ‘아가씨’를 111번 본 관객도 있었다. ‘N차 관람’ 순위에선 ‘아가씨’(4.8회) ‘곡성’(4.15회) ‘럭키’(4.1회) ‘덕혜옹주’(3.8회) ‘닥터 스트레인지’(3.7회) ‘인천상륙작전’(3.6회) 순으로 나타났다. 50만명 이상 동원한 영화를 대상으로 집계한 평균 반복 관람 횟수는 3.52회였다. 이들이 SNS에서 ‘N차 관람’ 인증을 하고 커뮤니티 게시판에서 영화에 대한 감상을 나누면서 팬덤으로 결집된다. ‘N차 관람’이 일반화되면서 영화 팬덤도 아이돌 팬덤처럼 일반화된 문화 현상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분석이다.

영화들의 극장 생존 기간이 짧아진 것도 한 가지 이유로 거론된다. 개봉 초반 관객 몰이가 부진하면 스크린이 급격히 줄어드는 산업적 환경에서 팬덤이 스스로 관람 기회를 만드는 방식으로 적극성을 띠게 됐다는 것이다. 김형석 영화 저널리스트는 “과거 마니아 관객층이 영화에 대한 포괄적 지식과 교양을 바탕으로 전 장르를 섭렵했다면 최근엔 자신의 취향에 맞는 특정 작품을 집중적으로 소비하는 경향이 강하다”며 “극장에서의 영화적 체험 자체를 중시하는 관객층이 넓어지고 있지만 극장들이 관객의 다변화된 요구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글〮ㆍ사진=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아갤러’를 양산한 영화 ‘아가씨’의 한 장면.
‘아수리언’ 들이 사랑한 영화 ‘아수라’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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