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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저녁을 찾아서] “근무시간 줄이고 임금 낮춰선 안돼”

입력
2017.07.07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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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사무직노동자연합(TCO)의 노동시간 전문가인 마츠 에세뮈르 박사는 "노동의 효율성과 생산성은 다양한 수단을 통해 성취될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건 근로시간 단축이 그 자체로 효율성을 만들어 낸다는 점"이라고 강조했다. 스톡홀름=박선영 기자
스웨덴 사무직노동자연합(TCO)의 노동시간 전문가인 마츠 에세뮈르 박사는 "노동의 효율성과 생산성은 다양한 수단을 통해 성취될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건 근로시간 단축이 그 자체로 효율성을 만들어 낸다는 점"이라고 강조했다. 스톡홀름=박선영 기자

다양한 노동시간 단축 모델 중

제조업 분야서 상당한 성과 보여

한국 주당 최대 68시간 근무는

1870년 유럽 노동자와 같은 수준

“6시간 근무제는 제조업 같은 블루칼라 분야가 성공률이 높죠. 기술혁신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니까요. 반면 화이트칼라 직종, 특히 노동력에 의존하는 서비스업은 생산성 상승을 이끌어 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지난달 1일 스웨덴 스톡홀름에 위치한 사무직노동자연합(TCO)에서 만난 노동시간 조사관 마츠 에세뮈르 박사는 “6시간 근무제의 성공 여부는 직종과 분야에 따라 큰 차이가 난다”고 말했다. TCO는 전문직ㆍ사무직 노동자 140만명을 조합원으로 둔 스웨덴에서 두 번째로 큰 노총. 교육, 의료, 무역, 언론, 경찰, 산업, IT 및 텔레콤 분야의 노동자들이 소속돼 있다.

스웨덴은 노동시간 단축의 프론티어 국가다. 1982년 노동시간법 제정으로 법정 노동시간이 주당 40시간으로 입법된 이후 끊임없이 6시간 근무제 실험을 국지적으로 펼치고 있다. 인간이 어디까지 노동시간을 줄일 수 있을 것인가를 논의할 때 스웨덴은 모두가 참고해야 하는 ‘세계의 실험실’이다.

올 1월 스웨덴 제2도시 고텐버그(예테보리)에서 종료된 시 정부 차원의 실험은 6시간 근무제 전격 도입의 바로미터로 주목을 받았다. 알츠하이머 등 노인 환자들을 돌보는 스바르테달렌스 요양병원의 간호사 68명이 2015년 2월부터 동일임금으로 주 40시간에서 30시간으로 2년간 근무시간을 하루 2시간씩 줄인 후 병가율, 생산성 등을 종합 측정하는 실험이었다.

3월 발표된 최종 보고서에 따르면, 간호사들의 병가는 약 10% 감소했고, 스스로 건강하다고 인식하는 비율은 50% 정도 상승했다. 환자들을 데리고 적극적으로 게임이나 야외산책에 나서는 등 업무 생산성도 대폭 증가했다. 하지만 비용이 문제였다. 추가 근무조로 15명의 간호사를 새로 고용하면서 연간 60만유로(7억8,000만원)의 인건비가 소요, 총 비용이 22%나 증가한 것이다. 고텐버그시가 “실험을 계속하거나 6시간 근무제를 입법할 계획이 없다”고 밝히고 실험을 종료함에 따라 6시간 근무제는 시기상조라고 보는 견해가 우세해졌다.

“앞서 1989년 스웨덴 북부 광산도시 키루나에서도 비슷한 실험이 있었습니다. 8시간에서 6시간으로 노동시간을 줄인 16년간 노동자들의 건강과 행복도는 향상됐죠. 하지만 25%의 인력 추가 고용을 상쇄할 만한 생산성 증가가 확인되지 않았어요.” 에세뮈르 박사는 “이 실험 역시 정치적 논쟁 끝에 2005년 폐지됐다”고 설명했다.

간단한 샌드위치와 도시락으로 점심을 즐기는 스웨덴의 직장인들. 짧은 근무시간 안에 최대의 생산성을 내기 위해서는 단출한 식문화가 필수적이다. 스톡홀름=박선영 기자
간단한 샌드위치와 도시락으로 점심을 즐기는 스웨덴의 직장인들. 짧은 근무시간 안에 최대의 생산성을 내기 위해서는 단출한 식문화가 필수적이다. 스톡홀름=박선영 기자

분명한 성공 사례도 있다. 고텐버그의 도요타 서비스센터다. 2000년 6시간 근무제를 도입한 이 자동차 수리센터는 수익 증대 및 고객 만족도 향상 등 성과를 낸 모범 사례로 꼽힌다. 에세뮈르 박사는 “도요타 서비스센터의 성공은 공장설비와 같은 실질자본이 많기 때문”이라며 “기계와 장비를 더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제조업 분야에서는 상당히 수익성이 있다”고 말했다.

문제는 총비용의 대부분이 임금으로 사용되고 있는 서비스업 분야. 여기선 창의성으로 생산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는 업종에서만 6시간 근무 실험이 지속되고 있다. 컴퓨터 게임 제작이나 디지털 마케팅 같은 업무를 하는 IT 스타트업, 광고 제작사나 디지털 프로덕션 같은 소규모 첨단 기업들이다.

스웨덴 사무직노동자연합(TCO)의 노동시간 조사관인 마츠 에세뮈르 박사는 “스웨덴은 법정 노동시간이 일일 8시간이지만 산별노조의 단체협약을 통해 실질 노동시간을 주당 38시간까지 낮췄다”고 말했다. 스톡홀름=박선영 기자
스웨덴 사무직노동자연합(TCO)의 노동시간 조사관인 마츠 에세뮈르 박사는 “스웨덴은 법정 노동시간이 일일 8시간이지만 산별노조의 단체협약을 통해 실질 노동시간을 주당 38시간까지 낮췄다”고 말했다. 스톡홀름=박선영 기자

“가장 중요한 것은 노동시간 단축은 임금과 균형을 맞춰야 한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둘 다 갖고 싶어하지만 일하는 시간을 줄이려면 임금 인상은 보류해야 해요. 그렇다고 임금을 낮춰서는 안 되고, 스웨덴의 경우 낮춘 적도 없습니다. 사용자가 감당할 수 있는 총비용을 고정해 놓고 노동시간과 임금인상을 맞교환하도록 사람들을 설득하는 게 노조의 임무죠.” 직원 중 일부만 대상으로 노동시간을 단축할 때는 임금 삭감이 불가피하지만, 조직 전체가 대상일 때는 임금 인상 자제가 유일한 해법이라며 “한국 노동자들은 절대로 고용주들이 임금을 낮추도록 놔두지 말라”고 그는 조언했다.

스웨덴을 비롯한 유럽 주요 선진국들이 실질 노동시간을 주당 40시간대(전일제 생산직 기준)로 감축한 시기는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다. 당시 이들 국가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는 1만 달러 대였다. 1980년을 기준으로 독일이 1만1,028달러, 프랑스 1만3,111달러, 네덜란드 1만3,393달러, 스웨덴 1만6,612달러에 불과했다. 2016년 현재 한국의 1인당 GDP는 2만7,632달러다. 유럽 선진국들이 부자 나라이기 때문에 노동시간을 과감히 단축할 수 있었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는 것이다. 현재 한국의 합법적 최대 노동시간인 주당 68시간은 1870년대 유럽의 전일제 생산직 노동자들이 일했던 시간이다. 유럽과 한국의 시차가 150년에 달하는 셈이다.

“스웨덴에서는 어떤 고용주나 정치인도 직원들이 더 오랜 시간 일해야 한다고 말할 수 없고 말해선 안 된다는 강력한 사회적 규범이 있습니다.” 하지만 에세뮈르 박사는 “노조는 노동자와 사용자 양쪽이 모두 만족할 수 있도록 설득하고 양보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강조했다. “노조가 너무 많은 걸 요구하면 회사는 파산하거나 외국으로 옮겨갈 테고, 어떤 노동자를 매우 부유하게 만드는 반면 다른 노동자들은 실직 상태로 몰아 넣는 불평등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노사가 협상에 서명을 했다면 그건 일종의 결혼관계입니다. 적이 아니라 부부인 거죠. 스웨덴 노사관계가 매우 건실한 것은 ‘부부’로서 오랜 세월 구축한 신뢰와 자신감 덕분이에요.”

스웨덴 스톡홀름 번화가에 위치한 사무직노동자연합(TCO) 건물의 1층 로비. 노동자와 사용자를 '부부'의 연으로 맺어주는 중개자 역할을 하는 곳이다. 스톡홀름=박선영 기자
스웨덴 스톡홀름 번화가에 위치한 사무직노동자연합(TCO) 건물의 1층 로비. 노동자와 사용자를 '부부'의 연으로 맺어주는 중개자 역할을 하는 곳이다. 스톡홀름=박선영 기자

노조조직률이 70%에 육박하고, 산별노조를 통한 단체협약의 적용을 받는 스웨덴의 ‘노사 부부’를, 결혼한 적도 없지만 증오하며 이혼한 것 같은 한국의 ‘부부’와 나란히 놓고 비교하긴 어렵다. 하지만 노동시간 단축이라는 국정 최우선 과제를 실현하기 위해 이 갈등 일변도의 대치 관계를 새로이 정립할 필요는 분명히 있다.

스톡홀름=박선영 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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