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학교만 졸업한 최연소 의사
신생아 죽음 원인 찾아 유학 떠나
유당불내증에 두유로 해법 찾아
국내 두유시장 1위…51% 점유율
시장 규모 줄면서 매출 추이 둔화
활로 모색 나섰지만 성과 불투명
3세 경영 길 열었지만 ‘오쎄’ 발목
히트상품 개발해 실적 끌어올려야
정식품 창업 초창기의 정재원 명예회장. 정식품 제공

베지밀을 탄생시킨 정재원 정식품 명예회장은 생존해 있는 한국 재계의 창업주 중 최고령이다. 1917년 황해도 은율에서 태어난 그는 올해 1월 100번째 생일을 치렀다. 정식품측에 따르면 정 명예회장은 여전히 정신이 맑고 또렷하며 의사소통에 불편함이 없을 정도로 정정하다.

정재원 정식품 명예회장.

정 명예회장의 지난 한 세기는 도전의 연속이었다. 특히 베지밀을 탄생시키기까지 과정은 깊은 울림 있는 한 편의 드라마다.

그는 고향에서 보통학교만 졸업하고 서울에 올라왔다.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자란 그는 대중목욕탕 심부름꾼, 모자가게 점원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 했다. 그러다 우연히 의학강습소의 급사 자리를 얻게 됐다. 등사기를 밀어서 강습소 학생들이 볼 강의 교재를 만들다 그는 그 교재를 들고 혼자 공부를 시작했다. 당시에는 의대에 다니지 않아도 시험만으로도 의사 면허증을 딸 수 있었던 터라 주경야독으로 2년간 매달린 끝에 그는 20세에 국내 최연소로 의사고시에 합격했다.

서울 성모병원 의사가 돼 평범하게 진료를 하던 중 운명적 상황과 맞닥뜨리게 된다. 뼈가 앙상하고 배만 볼록 솟은 갓난아기 환자를 맞게 된 것. 아이 엄마가 “제발 살려달라” 애원했지만 낫게 해줄 방법을 찾지 못했다. 아이는 끝내 세상을 떠났고 이후에도 복부 팽만으로 병원을 찾은 여러 신생아들이 설사만 하다가 무력하게 죽어갔다. 그는 자책과 의문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20여 년이 지난 1960년, 당시 43세였던 그는 갓난아기의 의문의 병을 고치겠다고 뒤늦은 유학의 길을 떠났다. 아내와 6남매의 자식, 안정된 삶을 놔두고 떠난 모험이었다. 처음엔 영국 런던대로 갔지만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해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UC메디컬센터로 건너가 많은 연구자료를 뒤져가며 공부했다. 유학을 떠난 지 4년 만에 그는 자료에서 ‘유당불내증(乳糖不耐症ㆍlactose intolerance)’을 접하게 된다. 드디어 의문의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했다. 유당불내증은 우유나 모유의 유당을 분해하는 효소가 부족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증상이다. 이 증상을 가진 신생아는 모유나 우유를 소화하지 못해 죽을 수도 있는 것이다.

우유나 모유의 대용식을 고민하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해주던 콩국이 떠올랐다. 그 길로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서울 명동에서 ‘정소아과’를 운영하며 아내와 함께 우유 대용식 개발에 매달렸다.

3년여 연구 끝에 원하는 두유 개발에 성공했다. 그 두유를 설사병에 걸린 신생아들에게 줬는데 아이들이 기적처럼 기력을 차리기 시작했다. 그는 “인생에서 최고로 기뻤던 순간”이라고 했다. 소문이 나면서 그의 병원에 환자들이 몰리기 시작했고, 두유 공급이 부족하게 됐다.

결국 그는 1973년 ‘정식품’이란 회사를 세워 두유 대량 생산에 나섰다. 두유가 식물성 우유라는 점에 착안해 식물(vegetable)과 우유(milk)의 영문을 합성한 ‘베지밀’이란 이름을 만들어 붙였다. 그렇게 시작된 베지밀의 성공신화가 지금껏 이어지고 있다.

정식품은 베지밀 출시 이후 지금껏 국내 두유시장 점유율 1위를 수성하고 있다. 여러 업체가 뛰어들었지만 정식품은 지난해에도 두유시장 점유율 51%를 기록하는 등 저만치 앞서나가고 있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시장조사전문회사 닐슨코리아에 따르면 국내 두유 시장은 2013년 3,950억원, 2014년 3,750억원, 2015년 3,620억원으로 매년 규모가 줄어들고 있다. 음료 시장이 커지면서 대체 제품이 많아지고, 젊은 층의 수요가 감소한 것이 주요 원인이다. 이에 대해 정식품 측은 “닐슨코리아 측의 자료엔 쿠팡 G마켓 등 오픈마켓 자료가 포함되지 않았다. 실제 오픈마켓에서 거래되는 양이 상당하며, 자체 분석으론 두유 시장은 유지 혹은 확대로 보고 있다. 두유 시장 자체가 줄어든다면 우리가 가장 먼저 영향을 받지 않겠는가“라고 반박했다.

문제는 정식품이 두유 시장에만 올인을 해온 것이다. 정식품의 매출 추이 그래프는 그리 희망적이지 않다. 정식품은 2006년에서 2012년까지 7년간 연평균 매출증가율이 8.1%에 이르는 높은 성장을 이어오다 2012년 이후 크게 둔화했다.

정식품의 지난해 매출액은 1,873억원이다. 정식품과 비슷한 시기 창업한 다른 식품회사들이 1조~2조원대 기업으로 성장한 것과 비교하면 초라한 실적이다.

정식품은 그동안 한 우물만 팠기에 큰 위기 없이 이 분야 1위를 지켜왔다고 자부하지만 업계에선 두유시장 선두에만 안주한 채 미래형 트렌드를 읽지 못하고 혁신이나 사업 확장을 등한시한 게 아니냐고 지적하고 있다.

최근 정식품도 위기를 느끼고 다양한 활로를 모색하고 있지만 쉽지 않다. 미국 중국 캐나다 호주 등 글로벌 진출을 나섰지만 의미 있는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높은 기술력이 있다 해도 중국이나 동남아의 경우 현지 두유에 비해 가격이 2, 3배 비싸다 보니 시장 공략이 쉽지 않다.

현재 정식품이 하는 건 코코넛, 호두 등에서 밀크를 추출하는 등 상품 개발의 다양화와 두유의 연령별 세분화 마케팅 정도다. 신사업으로 생수 시장에도 뛰어들었지만 획기적인 이익창출이 기대되진 않는다.

창업주인 정재원 명예회장이 아들인 정성수 회장에게 경영권을 넘겨준 건 2010년이다. 하지만 그 이후 정식품은 확장성을 띄지 못했다. 1세대가 넘겨준 안정적인 ‘한 우물’에만 안주해 새로운 동력을 찾는 걸 주저한 듯하다.

지난 연말 정식품은 3세 경영의 길을 텄다. 연말 임원인사에서 정 명예회장의 손자이자 정성수 회장의 장남인 정연호씨가 부사장으로 선임됐다. 정 부사장은 2014년 정식품의 관계사인 오쎄에 이사로 부임하면서 경영수업을 시작했다. 화장품 제조와 온라인 쇼핑몰, 광고대행 사업 등을 하는 오쎄는 사업 부진에 허우적거리다 2014년부터 자본잠식 상태에 빠져있다. 오쎄에서 경영 수업을 시작한 것이 3세 경영을 준비하는 정 부사장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는 상황이다.

업계 관계자는 “정식품이 매출 다각화와 새로운 히트 상품 개발을 통해 경영실적이 좋아져야 3세로 이어지는 경영도 쉽게 안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성원 선임기자 sungw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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