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국민이 대통령 뽑고 국회 만들어
"촛불민심으로 여소야대 돌파"는 과욕
대통령이 국민ㆍ야당 앞 직접 나서야
우원식(가운데) 민주당 원내대표가 22일 여야4당 원내대표 회동 결과를 발표하던 중 야당의 비협조에 마음고생이 심했던 듯 울먹이며 말을 잇지 못하고 있다. 배우한 기자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더니 역시 디테일(detail)이 문제였다.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한 모든 대선 후보들이 합창하듯 외친 협치 말이다. 협치는 소통과 네트워크를 중시하는 현대사회의 행정 지배구조를 뜻하는 영어 'governance'의 우리말 번역이다. 하지만, 매사 단순화하기 좋아하는 정치인들이 늘 그렇듯, 후보들에게도 이 말은 '협력하고 대화하고 타협하는 정치' 정도로 쉽게 이해됐던 것 같다.

그런데 말이 좋아 협력이고 대화고 타협이지, 누가 무엇을 어떤 환경에서 어떤 조건으로 주고받을 건지, 또 이 거래에서 당사자들은 각각 어떤 권한과 책임을 안게 되는지, 어느 지점에서 서로 이익의 균형을 이룰 것인지 등 협치의 구체적 내용을 채우는 얘기는 전혀 없었다. 협치가 이처럼 뜬구름 잡듯이 제기되고 제대로 논의되지도 못했으니 문재인 정부의 첫 내각 인선이 파행을 겪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에게 협치는 적폐 청산의 하위개념이다. 민주당 경선 과정에서 안희정 충남지사의 '선의' 발언이 진의를 살필 겨를도 없이 "분노가 없다"고 뭇매를 맞은 것은 한 사례다. 문 대통령은 대선 과정에서도 줄곧 압도적 지지를 호소하며 "그래야 적폐 세력이 개혁저항 의지를 꺾고 국민 눈치를 보게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나아가 여소야대 국회가 새 정부의 발목을 잡더라도 촛불민심의 힘으로 뚫고 갈 수 있다는 생각도 종종 드러냈다.

'내로남불'과 임명 강행으로 표현되는 작금의 인사 논란은, 의도했든 안 했든, 이 같은 문 대통령의 인식이 빚어낸 결과로 보인다. 인수위 없이 출범한 정부의 검증능력 한계를 인정한다고 해도 부실 논란에 대처하는 문 대통령의 화법과 태도는 적잖은 사람들에게 당혹감을 안겼다.

그는 강경화 외교장관 임명이 지연되자 "야당과의 협치를 위한 대통령과 정부의 노력이 마치 허공을 휘젓는 손짓처럼 허망한 일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참으로 안타깝다"며 최종 판단은 국민 몫이라고 말했다. 자신도 국민 뜻을 따를 테니 야당도 국민 판단을 존중해 달라는 것이다. 또 "국정이 안정된 시기의 인사와 근본적인 개혁을 요구하는 시기의 인사는 개념이 많이 다르다"며 야당이 청와대와 전쟁하는 것처럼 선전포고 운운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고 꼬집었다.

하지만 청와대가 야당과 협치의 공간을 만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근본적 개혁 시기의 여야 공감대를 만들기 위해 어떤 고민을 했는지 솔직히 의문이다. 문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이전 정부와 결을 달리하는 사이다 리더십을 선보이며 곳곳에 새 바람을 몰고 다녔다. 하지만 그 바람은 야당은 물론 여당에도 별로 미치지 못했다. 바람을 현실로 만들려면 국회부터 껴안아야 하는데도 말이다. 가끔 문 대통령의 인식에는 여소야대 국회를 만든 국민과 대통령을 만든 국민은 다르다는 위험한 발상마저 엿보인다. '국민 모두의 대통령'을 공언한 한 달여 전 취임사도 왠지 민망하다.

문 대통령이 5대 인사 원칙을 훼손할 수밖에 없었던 저간의 사정과 현실적 고심을 모르는바 아니다. 누구보다 그의 자괴감이 컸을 것이다. 반면 새 정부 첫 인선과 일자리 추경예산을 볼모로 잡은 야당의 고집이 정치도의를 벗어난 몽니이며 스스로 함정을 파는 행위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설령 야당이 강짜를 넘어 대선 불복을 선동하더라도 법과 제도의 틀 내에서 해결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가 존중하는 민주주의이고 대의정치다.

문 대통령은 사활적 권력게임이 벌어지는 정치에서 협치는 공허한 주장임을 진작에 깨달았을지 모른다. 의정 경력은 짧지만, 오늘 협치 얘기를 하다가 이해관계가 바뀌면 내일 곧바로 대치하는 정치권의 생리를 수없이 봐 온 까닭이다. 하지만 국회선진화법을 앞세운 국회 권력이 존재하는 한, 협치의 틀을 재정비하지 않고는 일자리와 검찰개혁 등 새 정부의 국정과제는 사사건건 제동이 걸릴 수밖에 없다. 문재인식 협치의 디테일이 지금 촛불민심 앞에 서야 하는 이유다. 시작은 언론과 야당에 대통령이 직접 다가가는 것이다.

이유식 논설고문 jtino57@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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