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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세상보기] 버블경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입력
2017.06.16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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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싱크대, 오래된 고급가구, 고장 난 보일러, 연체된 공과금 고지서. 여기는 서울 강남의 한 빌라이다. 독립한 딸이 몇 년 만에 찾은 집은 남루하다. 강남 중산층 가정에서 자란 그녀는 예술대학을 졸업했지만, 변변찮은 소득으로 도시의 값싼 곳을 전전하며 살았다. 상환하지 못한 학자금 대출금도 남아 있다. 한편, 화학공장 노동자였던 아버지는 1980년대 후반 서울로 올라왔다. 부모님은 소위 ‘집 장사’로 큰돈을 벌었고, 강남에 아파트를 구입했다. 그러나 IMF 이후 가족은 아파트 건너편 빌라로 이사했다. 15년째 강남을 떠나지 못한 채 다시 아파트로 이사할 날만 기다리고 있다. 언젠가 예전처럼 부동산에 투자하면 다시 성공궤도에 진입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오늘의 고난을 견딘다.

이 이야기는 다큐멘터리 ‘버블패밀리’에 등장하는 한 가족의 서사이자, 마민지 감독의 자전적 기록이기도 하다. 그동안 강남 중산층의 몰락과 욕망은 ‘아파트 키드’를 중심으로 소개된 바 있다. 어린 시절 강남 아파트에 살던 중산층 아이들이 지금은 부모세대보다 더 못한 경제적 조건에 살고 있으며, 그 부모들 또한 IMF 이후 몰락했다는 서사는 익숙하다. 그런데도 이 다큐멘터리는 ‘아파트 키드’가 아닌 ‘버블패밀리’의 관점에서 도시와 가족, 중산층을 향한 욕망을 풀어낸다.

'버블 패밀리‘는 마치 종식을 고한 버블경제 담론의 속내를 다시 들춰내듯, 먼저 온 세대의 욕망은 여전히 진행 중이며 때로 그 욕망이 다음 세대를 옭아매는 덫이 되기도 한다고 비판한다.

더 나아질 것 없는 경제 상황에서 늘어가는 건 빚뿐이지만 부모는 ‘강남’과 ‘집’을 포기할 수 없다. 여기에 더 이상 포기할 것이 없는 자식은 대학을 나오고 일을 하지만 부모보다 더 빈곤한 생활을 한다. 동시대를 살면서 다른 세상을 경험하는 것이다. ‘버블패밀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질문을 던진다. 대체 강남, 아파트, 부동산에 대한 욕망이 어디에서 흘러왔고 누구에게 머무는지. 언제부터 부모님은 집에 대한 욕망을 품기 시작했고, 거품 경제가 꺼진 후에도 왜 그것을 놓지 못하는지. 감독은 가족 내 간극과 균열을 끈질기게 추적한다.

성공을 경험한 사람들은 성공을 가능하게 했던 시대적인 조건에 대해 종종 잊는다. 국가정책과 도시의 변화는 부동산 붐을 낳았고, 그곳에 부모는 운 좋게 중산층에 합류할 수 있었다. 3저 호황(저금리, 저유가, 저달러)기에 집을 지어 부를 누렸던 부모는 가계가 기울었음에도 자녀에게 더 강한 집착으로 욕망을 전수하려 한다. 제작비로 받은 100만원을 투자하라고 권하는 감독의 아버지와 딸의 명의로 몰래 땅을 사 둔 어머니는 그렇게 다시 재기를 꿈꾼다.

그러나 자식은 아무리 운이 좋아도 부모세대의 부귀를 누릴 수 없다. 우리의 현재와 미래는 과거 버블경제와 같지 않을 것이며, 갑자기 경제성장률이 높아질 리 만무하다. 그러니 중산층을 향한 욕망이 신기루 위에 지어진 것이라는 점을 간파한 자녀에게 부모의 처세는 답답하게만 느껴진다.

청년 세대의 오늘은 부모보다 먼저 도착한 미래이다. 그동안 한국사회는 늘 다음세대의 미래를 착취하고, 그것을 담보로 과거와 현재를 살아왔다. 우리사회는 다음 세대의 몫을 얼마나 남겨 두었는가? 물으면 거의 소멸에 가깝다고 답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와 내가 앞으로 살아갈 세상은 지금보다 가족, 부채, 버블경제로부터 자유로운 곳이면 좋겠다. 과거에서 이어져 온 버블경제의 왜곡된 유산과 욕망을 끊어 내기 위해 우리는 더 날카롭게 질문을 벼리고, 냉철하게 묻고, 이건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어둠 속에서 눈동자의 초점을 더 선명하게 맞추어 세상을 읽어 내는 힘을 기르는 일이다. 그럴 때 비로소 버블경제는 종식을 고할 것이다.

천주희 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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