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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저녁을 찾아서] 정부가 밀어붙인 ‘주 35시간’… 더 행복해진 프랑스

입력
2017.06.16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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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 반발 속 법부터 개정해

재정 투입하며 ‘주35시간’ 연착륙

5년간 일자리 35만개 새로 생겨나

지난달 25일 오후 프랑스 파리 14구의 스타트업 기업 ‘어반 챌린지’ 사무실. 건물 1층 출입문을 열고 들어서자 10여 명의 직원들이 컴퓨터를 켜고 분주히 일하고 있다. 인사를 건네도 힐끔 바라볼 뿐 ‘집중에 방해됩니다’는 경고가 담긴 듯한 표정이다. 잠시 후 장 필립 브누아스트(37) 대표가 반갑게 맞아주며 회의실로 안내했다. 놀랍게도 회의실에 가정집 부엌 같은 싱크대가 눈에 띄었다. “간단히 요리해 먹을 수 있는 공간입니다. 누가 뭘 먹고 마시든 눈치 볼 필요가 없어요. 모든 게 자율입니다.” 잠시 후 직원들이 하나 둘 대표에게 인사도 없이 사무실을 떠났다. 시계는 오후 5시10분. “퇴근하는 거냐”고 묻자 브누아스트 대표는 “퇴근은 오후 5시~5시30분, 출근은 오전 9~10시에 자유롭게 합니다. 야근을 하면 다음날 더 늦게 나오죠”라고 설명했다. 점심시간 1시간과 법이 보장한 오전 15분, 오후 15분의 휴식시간을 빼면 하루에 길어야 7시간을 일하는 셈이다. 직원마다 출퇴근 시간이 달라 업무상 불편도 있을 터. 이를 최소화하기 위한 커다란 화이트보드가 사무실 벽 한 쪽에 걸려있다. 한 달 단위로 회사 주요 일정과 휴가 등 직원 별 일정을 적어 공유한다. 근무 스케줄 관리 담당자도 따로 있다.

파리 14구의 스타트업 기업 '어반 챌린지' 사무실에서 직원들이 각자 업무에 집중하고 있다. 파리 =박상준 기자 buttonpr@hankookilbo.com
파리 14구의 스타트업 기업 '어반 챌린지' 사무실에서 직원들이 각자 업무에 집중하고 있다. 파리 =박상준 기자 buttonpr@hankookilbo.com

7시간 한도와 약간의 유연성을 결합한 어반 챌린지의 근무제도는 아무 문제 없이 굴러갈 뿐만 아니라 회사를 ‘잘 나가게’ 하는 원동력이다. 운동은 하고 싶지만 헬스장 같은 실내는 싫은 사람들을 위해 야외 스포츠센터라는 신 사업을 내걸고 2010년 설립된 이 회사는 브누아스트 대표를 포함 3명뿐이던 직원이 이제 12명으로 늘고, 80만유로(약 10억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파리 시내 공원 10여 곳을 거점 삼아 탈의실, 샤워실 등은 시 운영 시설을 활용하고 운동 프로그램을 인터넷에 공개해 고객을 모집한 결과 야외에서 전문 트레이너들과 운동을 즐기려는 이들이 모여들었다. 3년 전부터는 기업이나 기관의 직원들을 대상으로 줌바, 요가, 명상 등 다양한 운동, 웰빙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기업 간 거래(B2B) 서비스를 시작, 현재 매출의 절반 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많은 스타트업 기업처럼 참신하고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사업의 핵심이다 보니, 직원 만족도를 높일 단시간 유연 근무가 생산성을 더 높인다고 브누아스트 대표는 믿고 있다. “직원 개인의 삶에 만족할수록 일에 더 집중할 수 있습니다. 고객 스케줄에 맞춰 서비스를 제공하느라 야근이나 주말 근무도 하지만 주 35시간 근무는 철칙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정부가 주도한 노동시간 단축

올해로 시행 19년째인 주 35시간 근무제는 프랑스 국민에게 일ㆍ가정 양립을 보장해 주는 주춧돌이다. 선진국들이 산업화 시대를 지나며 노동시간이 줄어든 것은 일반적 경향이지만 프랑스만큼 정부가 주도한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1998년 자크 시라크 대통령과 동거 정부를 이뤘던 사회당의 리오넬 조스팽 총리는 ‘조금 덜 일하면 모두가 일할 수 있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법정 근로시간을 주 39시간에서 35시간(연간 연장근로 130시간)으로 낮추는 법 개정안을 통과시켜 2000년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두 자릿수 넘는 실업률을 해결하고, 일과 가정의 조화를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주 39시간 근로가 1982년부터 이어져 왔으니 19년 만의 변화였다.

물론 갈등이 없지 않았다. 프랑스 최대 노동조합인 프랑스노동총연맹(CGT)의 장 마크 카농 공무원노조 총서기관은 노사 모두 불만이 많았다고 했다. 그는 “사용자 측은 근로시간만 줄고 임금은 똑같이 줘야 해 기업 부담만 커진다고 반발했습니다. 노조 쪽에서는 못다한 일을 연장 근로로 해야 할 경우 명확한 임금 보상이 필요하다고 요구했고요.”

프랑스 파리 인근 몽트뢰이시에 있는 최대 노조 프랑스노동총연맹(CGT) 사무실에서 장 마크 카농 공무원 노조 총서기관이 주 35시간제가 어떤 과정을 거쳐 정착했는지 설명하고 있다. 몽트뢰이=박상준 기자 buttonpr@hankookilbo.com
프랑스 파리 인근 몽트뢰이시에 있는 최대 노조 프랑스노동총연맹(CGT) 사무실에서 장 마크 카농 공무원 노조 총서기관이 주 35시간제가 어떤 과정을 거쳐 정착했는지 설명하고 있다. 몽트뢰이=박상준 기자 buttonpr@hankookilbo.com

그러나 프랑스 정부는 노동시간 단축을 밀어붙였다. 노사 양측과 협약 없이 법부터 개정했다. 무엇보다 여론의 지지가 컸다. 서울시립대 유럽연합(EU) 연구센터 손영우 박사는 “당시 정부의 성탄절 상여금 동결을 계기로 ‘상여금 3,000프랑(약 80만원) 즉각 지급’을 요구하며 시작된 실업자 투쟁이 전국에서 들불처럼 일어났다. 경제난을 해결하라는 압박이 커졌고, 근로시간 단축 카드에 호응이 컸던 것”이라고 말했다.

노사에 당근 내밀며 설득 나선 정부

1919년부터 근로시간을 법으로 규정해 온 역사적 전통도 작용했다. 노사 갈등이 극심해 정부가 단호히 나서지 않고선 애초에 합의가 어렵기도 했다. 이 대목에서 한국 상황과의 가장 큰 차이점은 정부가 신뢰받는 국가기관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카농 총서기관은 “프랑스에는 노사정위원회 같은 상설 기구는 없고 필요한 경우 정부가 노사와 협의할 뿐이지만, 기본적으로 중립적 입장에서 민주 절차에 따라 사회적 합의를 지켜 나갈 것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말했다. “만약 정부가 합의를 어긴다면요? 혁명의 나라 프랑스의 시민들이 거리로 나올 겁니다.”

정부는 사용자 측의 반발을 줄이고자 세금 감면 혜택을 주는 한편, 신규 고용 창출을 위해 시간 외 노동에 대해선 부가세를 매겼다. 10% 이상 근로시간을 줄이고, 6% 이상 신규 고용을 한 기업에는 1인당 연간 9,000∼1만3,000프랑(약 230만∼300만원)을 5년간 국가가 지원했다.

정부의 입법과 재정 투입을 통해 주 35시간제는 빠르게 자리를 잡았다. 프랑스 노동부 산하 조사통계국 다레스 집계에 따르면 2002년 말 이미 전체 노동자의 절반 이상이 주 35시간 이하 근무에 진입했다. 직원 20명 이상 회사 정규직 중 1996년엔 1.6%만 주 35시간 이하로 일했지만 2002년엔 62%가 주 35시간 근무를 했다.

단축 후 일자리 수십만개 늘어

좌파, 우파 그리고 학자들마다 그 수치에 대해선 견해 차이가 있지만 일자리 창출 효과도 확실했다. 프랑스 내 중소자영업자들의 모임 오다스의 프랑수아 루이 부와이예 다르장송 대표는 “정부는 70만개 일자리를 만들겠다고 했지만 최대 30만개 남짓”이라고 박한 평가를 한 반면 카농 총서기관은 “최소 50만개”라고 좀더 후하게 평가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노동시간 단축 후 5년 동안 35만개의 일자리가 생겼다고 분석했다. 또 노동시간 단축 직후인 2000, 2001년 임시직 5명 중 1명이 정규직으로 채용된 것으로 추산된다.

프랑스 중소자영업자들의 모임 오다스의 프랑수아 루이 부와이예 다르장송 대표가 주35시간제에 대한 중소기업들의 입장을 설명하고 있다. 파리=박상준 기자 buttonpr@hankookilbo.com
프랑스 중소자영업자들의 모임 오다스의 프랑수아 루이 부와이예 다르장송 대표가 주35시간제에 대한 중소기업들의 입장을 설명하고 있다. 파리=박상준 기자 buttonpr@hankookilbo.com

가능한 빨리 직장서 벗어나는 풍토

저녁 회식 없고 송년 회식도 점심에

업무시간 각자 조정하고 성과만 평가

맞벌이는 교대로 아이 등하교 시켜

더 확실한 성과는 일과 가정의 양립이다. 다레스 설문 결과, 응답자의 59.2%가 주 35시간 시행 이후 일상 생활 수준이 향상됐다고 답했다. 파리의 한 대학에서 전산직 공무원으로 일하는 다비드 샤스타네(47)씨는 “주 35시간제는 삶과 노동의 균형이라는 면에서 분명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 세대는 주 5일, 오전 9시부터 오후 7시까지 총 48시간을 일했죠. 주로 아버지 혼자 벌어 4인 가족을 부양했습니다. 지금은 맞벌이 부부가 많지만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이를 가능케 한 것이 주 35시간 근무제입니다”라고 말했다. 카농 총서기관은 “일하는 시간이 길고, 근무 환경이 나쁠수록 산재와 병가가 늘어납니다. 건강한 노동환경 확보가 곧 생산성 향상으로 가는 길이고 그 핵심은 근로시간을 줄이는 것이죠”라고 말했다.

파리의 한 인테리어 회사 부사장인 장 뤽씨가 지난달 23일(현지시간) 학교 수업 후 자택 인근 문화센터에서 합기도 수업을 마친 아들 엔조와 함께 집으로 향하고 있다. 몽트뢰이=박상준 기자 buttonpr@hankookilbo.com
파리의 한 인테리어 회사 부사장인 장 뤽씨가 지난달 23일(현지시간) 학교 수업 후 자택 인근 문화센터에서 합기도 수업을 마친 아들 엔조와 함께 집으로 향하고 있다. 몽트뢰이=박상준 기자 buttonpr@hankookilbo.com

삶의 질 향상은 더 확실한 성과

파리의 한 인테리어회사 부사장인 장 뤽 소르(45)씨와 부인 김나영(49)씨 부부가 맞벌이로 일하면서 초등학교 1학년 아들 엔조를 함께 돌보는 것은 주 35시간제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다. 화요일인 지난달 23일 소르씨는 오후 4시에 퇴근해 학교를 마친 아들을 데리고 문화센터 합기도 수업을 갔다가 근처 공원 놀이터로 향했다. 오후 6시가 안 된 시간에 공원은 아장아장 걷는 아기부터 초등학생까지 아이 수십 명과 아빠, 엄마들로 북적거렸다. 소르씨는 매일 오전 9시까지 아들 등교를 책임지고, 오전 10시부터 근무를 시작한다. 보통 오후 7시에 퇴근하지만 화요일은 조기 퇴근해 아들을 저녁까지 돌본다. 부인 김씨는 화요일을 제외한 나머지 요일 아들의 하교와 저녁을 담당한다. 학교가 오전 수업만 하는 수요일은 아예 하루를 쉰다. 김씨는 3년 전부터 주 26시간만 일하고 있다.

남편이 아들을 돌보는 사이 운동을 마치고 놀이터에서 합류한 김씨는 “큰 회사든 작은 회사든 프랑스 기업은 저녁 회식이 없어요. 송년 회식도 점심 때 해요. 아이가 있는 프랑스 직장인은 가능한 한 빨리 사무실을 벗어나죠. 동료들은 가정사로 사무실을 비워도 충분히 이해하는 분위기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래도 회사는 잘 돌아간다. 업무시간이 아닌 성과로 평가받기 때문이다. “업무량이나 업무 시간은 각자 알아서 조정합니다. 대신 업무 성과로 평가를 받아요.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이 늘어나는 만큼 업무 시간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일에 더 집중하는 거죠.”

몽트뢰이시의 한 공원 놀이터에서 평일 늦은 오후인데도 뛰어노는 아이들과 이들을 지켜보는 부모들로 북적거렸다. 기자의 눈에 띈 것은 아이들 곁에 있는 많은 아빠들의 모습이었다. 몽트뢰이=박상준기자 buttonpr@hankookilbo.com
몽트뢰이시의 한 공원 놀이터에서 평일 늦은 오후인데도 뛰어노는 아이들과 이들을 지켜보는 부모들로 북적거렸다. 기자의 눈에 띈 것은 아이들 곁에 있는 많은 아빠들의 모습이었다. 몽트뢰이=박상준기자 buttonpr@hankookilbo.com

주 35시간 근무가 당연한 권리이자 문화가 된 프랑스에서 일하는 것도 쉬는 것도 눈치를 보는 직장인은 없다. 사원은 업무 결과에 대해 책임지고, 회사는 직원들이 머뭇거리지 않고 의견을 내고 열정을 발휘하도록 할 뿐이다. 그 핵심에 노동시간 단축이 자리하고 있었다. buttonp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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