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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진의 입기, 읽기] 패션, 도용과 오마주 사이

입력
2017.06.07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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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가 패션 브랜드를 패러디한 티셔츠 로고.
고가 패션 브랜드를 패러디한 티셔츠 로고.

패션에서 표절과 도용은 오랫동안 이슈가 돼 왔다. 프랑스 파리와 이탈리아 밀라노의 캣워크에 서는 디자이너의 이름이 걸려 있는 고가의 패션 브랜드부터 중ㆍ저가 브랜드, 패스트 패션, 인디 브랜드, 시장에서 파는 조악한 모조품까지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루이 비통이나 버버리 같은 아이코닉한 로고를 가지고 있는 브랜드는 아마 지금도 어디에선가 도용 제품을 적발하고 있을 것이다.

최근 들어 이 문제는 단순히 베꼈냐 아니냐의 문제를 넘어서고 있다. 복각, 재해석, 패러디와 인용, 오마주 등의 이름으로 지금까지와는 다른 양상을 보이며 이야기가 복잡해지고 있다. 즉 오히려 적극적으로 대놓고 하는 카피(복제)로 새로운 패션을 만들려는 시도도 있다.

보통의 경우 저렴한 브랜드가 비싼 브랜드를 카피한다. 그냥 도용하면 법적으로 문제가 되기 때문에 약간의 트릭(속임수, 장난)을 넣는다. 즉 베트멍을 ‘VETEMFNTS’라고 적거나 셀린느를 ‘펠린느’라고 적은 티셔츠나 후드티 같은 걸 내놓는 것이다. 시장에 가면 나이스(Nice), 채널(Channel)처럼 어디서 보긴 했는데 뭔가 이상한 상표명이 적혀 있는 조악한 모조품을 볼 수 있는 데 그것과 크게 다를 게 없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같은 데서 인기를 끌고 그렇게 트렌드를 만든다는 점이 다르다. 이런 걸 원본을 대체하려는 모조품(Counterfeit)과 비교해 녹오프(Knockoffㆍ속어로 강도, 절도) 패션이라고 구분하는 사람도 있다.

부정적으로 보자면 다른 브랜드의 인기에 손쉽게 올라타려는 것이고 긍정적으로 보자면 조악한 모조품을 일종의 유머와 장난으로 승화시켜 새로운 패션을 만들어 낸 것으로도 볼 수도 있다. 디자인의 수명이 극단적으로 짧아지면서 이제는 ‘지나가다 던지는 한마디 농담’ 같은 게 패션으로 설 수 있는 자리가 생긴 것이다.

역방향도 있다. 비싼 브랜드가 저렴한 브랜드를 이용하는 것이다. 베트멍의 경우 운송 회사 DHL의 직원이 입는 티셔츠를 ‘재해석’해 DHL의 직원들이 평소 입고 있을 법한 티셔츠를 내놓은 적이 있다. 후드 바이 에어는 노스페이스 로고와 거의 비슷하게 생긴 로고가 붙은 옷을 컬렉션에서 선보였다. 발렌시아가는 누가 봐도 이케아 쇼핑백이 생각나는 가방을 파란색 가죽으로 만들어 내놓기도 했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이런 시도는 스트리트 패션의 유행과 관련이 깊다. 레트로(복고)가 유행하면서 과거를 쉽게 복기할 수 있는 레퍼런스(참고, 기준)로 익숙한 로고와 프린트를 직접 가져와 버리는 거다. 그 이정표가 너무나 선명하다는 점에서 고급 패션의 섬세한 방식이라고는 말하기 어렵지만, 그 정도로 직접적이어야 유머가 먹히는 시대라는 뜻이기도 하다.

위의 두 가지 방향이 섞여 있는 경우도 있다. 1980년대 힙합 초기 미국 뉴욕에서 활동한 대퍼 댄이라는 디자이너는 당시 유행하던 고급 브랜드의 로고 프린트에 퍼(동물 털)와 금, 가죽 등을 섞어 뮤지션이 원하는 화려한 패션을 만들어 냈다. 사실 브랜드 무단 도용이었고, 결국 브랜드의 소송 때문에 문을 닫았다. 그럼에도 그 독특한 패션은 후대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구찌 인터넷 홈페이지
구찌 인터넷 홈페이지

대퍼 댄이 만든 옷 중에 루이 비통의 프린트에 퍼를 결합한 재킷이 있었다. 올해 구찌의 크루즈 패션쇼에서 그것과 똑같게 생겼는데 프린트만 구찌 로고로 바꿔 놓은 옷이 등장했다. 도용으로 만든 거리의 옷을 고급 패션이 재인용해 새로운 옷을 만든 것이다. 표절이 아니냐는 논란이 일자 구찌는 “예전 패션에 대한 오마주였다”고 답했다.

도용과 인용, 패러디와 오마주는 휙휙 바뀌는 트렌드 속에서 과거의 패션과 문화를 재해석하고 불러내는 방식 중 하나로 사용되고 있다. 이런 시도는 완전한 새로움이 등장하기 어려운 환경에서 새로운 패션을 만들어 내고 나아가는 동력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법적으로 정리되지 않은 문제들이 아직 많다. 한번 웃고 마는 패션도 재미있고, 직설적인 농담 같은 고급 패션의 기발함도 좋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 소규모 인디 디자이너의 창조적 노력이 거대 회사의 도용에 의해 하릴없이 묻혀 버리는 일도 계속되고 있다. 즉, 기준을 세우고 정리하는 게 필요한 시점이라 하겠다.

패션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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