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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진의 삶이 있는 풍경] 밥 하고 설거지 하고

입력
2017.06.06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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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7시가 되면 저절로 눈이 떠진다.

밤새 굳은 몸을 털어 잠을 쫓은 뒤 살풋한 걸음으로 슬며시 안방 문을 열어 본다. 아직 곤한 잠에 빠져있는 딸아이와 아내를 살핀다. 태어난 지 20개월, 우리 아이는 아직껏 새벽에 몇 번씩이나 잠에서 깨어 운다. ‘엄마 껌딱지’인 딸을 달래느라 늘 잠을 설치는 아내에게 이 시간은 꿀맛 같은 시간이다. 오죽하면 심각한 수준의 내 코골이 때문에 아내의 수면에 방해가 될까 봐 자진해서 거실로 물러난 지 벌써 하 세월(?)이 흘렀을까. 혹시나 둘 다 잠이 깰까 봐 조심조심 주방으로 자리를 옮긴 뒤 미리 불려둔 쌀의 물을 조절한 후 콩을 섞어 압력밥솥에 불을 댕긴다. 딸아이에게 먹일 밑반찬을 만드는 게 다음 순서다. 보통 전날 끓여 둔 국을 데우고 계란프라이를 하거나 감자 등을 채 썰어 볶는다.

“치이이익~”하고 열이 오른 압력밥솥에서 구수한 밥 내음이 퍼질 즈음 아이에게 먹일 아침식사 준비가 대략 끝나있을 만큼 손놀림이 꽤 빨라졌다. 이어 보온밥솥에 밥을 옮기고 압력밥솥에 일부 남은 밥을 눌려 누룽지를 만든다. 눌은밥과 숭늉을 좋아하는 두 모녀의 필수적인 후식 목록이다. 잠은 딸아이가 항상 먼저 깬다. “아빠아~” 하고 눈을 비비며 나오는 아이를 볼 때 말할 수 없이 행복하다. 에피타이저로 딸아이가 좋아하는 유아용 치즈를 먹인 뒤 의자에 앉혀 몇 숟가락의 밥을 먹이고 있으면 잠에서 깬 아내가 방에서 나온다. 식탁 위에 차려놓은 밥과 국으로 아침식사를 마친 아내는 서둘러 딸아이와 함께 샤워를 하고 나갈 채비를 한다. 그 사이 나는 설거지를 마치고 음식물 쓰레기와 식탁주변을 정리한 뒤 식구들 중 마지막으로 씻는다. 자가운전으로 딸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긴 뒤 출근하는 아내를 배웅하고 나서야 분주했던 두 시간의 아침시간이 지나간다.

매일 아침 우리집의 일상풍경이다. 아침뿐만 아니라 집에 있는 시간 동안에는 식사준비와 설거지를 나의 몫으로 삼는다. 아내가 임신했을 즈음 시작해 지금까지, 그리고 아마도 계속 이런 일상은 변함이 없을 듯싶다. 딸아이의 출산을 한 달여 앞두고 아내에게 느꼈던 감동의 순간을 기억하고 있다. 만삭의 아내가 자신의 배를 어루만지며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에게 다정하게 속삭이는 모습이었다. 그 순간 결심한 내 자신과의 약속이 아내를 위해 밥과 설거지는 내가 한다는 것이었다.

결혼 전 국제개발협력 분야의 시민사회 활동가로서 자신의 역할에 큰 자긍심을 가졌던 아내는 출산과 육아를 위해 2년 가까이 휴직을 해야 했다. 그 기간 동안 자기 개인의 성장을 위하거나 업무의 지속을 위한 재충전 같은 시도는 전혀 엄두조차 낼 수가 없었다. 다른 것을 떠나 우리나라의 여성들이 결혼에 따른 출산과 육아문제로 인해 독립적 자아로서 자신의 성장을 멈추게 되는 상황이 무척이나 안타깝다.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남성들은 여성에 비해 훨씬 유리한 입장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최근 아내는 평화교육을 전문으로 하는 시민단체에 합류해 다시 사회활동을 시작했다. 낮 시간 동안 어린이집에 아이를 맡기고 하루 다섯 시간만 일하는 반상근직이지만 아내의 표정은 한결 밝아졌고 무엇보다 자신이 원하는 분야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된 것에 큰 기쁨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그런 아내를 지켜보는 일은 무척 신나는 일이다. 자신의 삶을 멋지게 개척해나가는 아내를 지켜보는 것은 남편이자 남성들의 소소한 행복거리 중 하나이지 않을까. 이 글을 읽고 그윽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남성들의 연락이 몹시 기다려진다.

임종진 달팽이사진골방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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