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지 않을 권리

현대사회에서 '일 하는 삶'이 곧 정상적인 삶이다. 데이비드 프레인은 저서 '일하지 않을 권리'에서 우리가 얼마나 무의식적으로 일을 의무라고 생각해 왔는지, 덜 물질주의적인 삶을 발견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 생각할 기회를 준다. 게티이미지뱅크

“게으름뱅이로서 나는 맹세한다. 터무니없이 오랜 시간을, 특히 몇몇 기업 양아치들을 위해서 일하지 않으려 투쟁하기로. 더 많이 웃기로. 토하기 전에 정시 근무라는 회전목마에서 내려오기로. 아무리 사소한 수준이라도, 세계와 주위 사람을 변화시키기로…”

영국의 ‘게으름뱅이 연합’은 이런 맹세를 한다. 이들이 엄청난 괴짜이거나 사회 낙오자라는 편견은 접어두자. 우리 모두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나는 왜 이렇게 일하고 있나’라는 울분을 토해낸 적이 있으며, ‘언젠가 사직서를 낼 그 날’을 상상하며 출근하지 않던가. 정시 출퇴근 고용을 거부한 이들은 일이 자신의 삶을 집어삼키지 못하도록 대안적인 삶을 선택했을 뿐이다.

사회학 연구자인 데이비드 프레인은 저서 ‘일하지 않을 권리’에서 ‘일’을 소득을 얻고, 정체성을 찾고, 사회에 기여하며, 타인이 사는 방식에 맞춰 살아가는 주요 수단으로 정의한다. 프레인이 직접 만난 일 거부자들의 이야기가 생생하게 담겼다. 일을 그만두거나 시간제 일자리를 선택한 일 거부자들의 소망은 그저 일상생활 속에서 조금이라도 덜 쫓기고 스트레스를 덜 받는 것이다.

그렇다. 이런 삶도 있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은 일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생각조차 해보지 못한 채 평생을 산다. 일을 하지 않는 실업자 조차도 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구직 중’인 상태이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에서 인간은 장시간 노동에 괴로운 이들과 자신의 노동력이 더 이상 유용하지 않아 고통 받는 이들로 나뉜다.

왜 우리는 ‘일 하는 삶’을 정상적이고 기본적이라고 생각하게 된 걸까? 프레인에 따르면 이것도 사회적 학습이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통해 일이 갖는 지위는 윤리적 의무 수준으로 높아졌다. 현대사회에서 시간과 기력을 뺏긴 노동자들은 자신을 채우기 위해 소비라는 방법을 택한다. 소비는 노동을 통해 얻는 소득에 대한 의존도를 강화하고, 일에 저항하기란 갈수록 어려워진다. 기술이 발전하면 인간의 노동시간이 현저히 줄고 여가시간이 급증할 것이라 예상했던 경제학자들의 예상은 빗나갔다. 일찍이 아도르노는 부유한 사회에서는 진정한 여가가 아닌 질 낮은 자유시간만 넘쳐난다고 주장했다. 저녁과 주말뿐인 자유시간, 일하지 않는 시간은 다시 일을 하기 위한 체력회복과 오락물 소비를 하며 흘러갈 뿐이다. 게다가 스마트폰의 발달로 노동자들은 ‘언제나 응답 가능해야 하는 상태’까지 놓이게 됐다.

이 책이 모두에게 사표를 던지라고 부추기는 건 아니다. 일에 저항한다고 모두가 행복하기만 한 것도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짚는다. 일의 포기는 금전적 어려움과 같은 말이다. 다만 우리가 얼마나 무의식적으로 일을 의무라고 생각해 왔는지, 덜 물질주의적인 삶을 발견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 에리히 프롬이 말했던 ‘소유’와 ‘존재’ 중 후자의 삶을 사는 것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준다.

유럽 국가들에서는 노동시간을 더 단축하려는 실험이 이어지고 있다. 저소득 노동자의 소득 손실을 최소화하면서 노동시간을 줄이기 위해 기본소득이 대안으로 제시된다. 문재인 대통령도 주 최대 68시간 노동시간을 52시간으로 줄이는 방안을 추진한다. 우리에게도 “일하기 위해 구입한 옷을 입고, 교통 체증 속에서 여전히 할부금을 물고 있는 자동차를 운전해서 옷과 자동차, 그리고 생계를 유지하느라 종일 비워두기만 할 집에 드는 돈을 벌 수 있는 직장에 가는”(앨런 굿먼) 삶 보다 나은 생을 살 기회가 주어질 것인가.

양진하 기자 realh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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