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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위가 불러온 소리의 맛

입력
2017.05.31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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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파쵸. 천운영 제공
가스파쵸. 천운영 제공

어느새 더워졌다. 이제 겨우 5월이 지났을 뿐인데. 한낮의 햇살이 만만치가 않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사람들 손에는 어김없이 아이스커피다. 더위엔 역시 얼음 동동 뜬 것들을 손에 쥐어야지. 냉면집 줄이 하염없이 길어진 건 말할 것도 없다. 스테인리스 그릇을 휘젓는 젓가락 소리, 쯔윽쯔윽 고요히 부산한 그 소리가 바로 여름의 소리다. 오래 전 여름 설탕물 녹이던 숟가락 소리와 똑같다.

여름에 우리식구는 자주 설탕물을 마셨다. 꿀물도 아니고 그냥 설탕물. 맹물에 설탕 몇 숟가락 넣고 휘휘 저은 다음 깬 얼음 넣으면 끝. 세 모금쯤 꿀꺽꿀꺽 마시고 나면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었다. 당분이 혈관을 타고 퍼지는 느낌. 더위와 피로를 단박에 처리할 수 있었다. 그 물에 소면을 말아 먹기도 했다. 다른 건 아무 것도 들지 않은 그냥 설탕국수다. 소바니 냉면이니는 알지도 못했던 시절이었다. 설탕 농도에 따라, 설탕물을 만들어 붓느냐, 면에 설탕을 뿌려 녹이느냐에 따라, 나름 맛 차이도 있었다. 평양냉면 육수를 따라갈 순 없지만 나름 단조롭게 심오했다. 설탕 뿌린 토마토를 먹고 난 다음 접시에 자박하게 고인 설탕물을 먹을 수 있는 건 선택받은 자의 몫. 그야말로 고급스런 설탕물이었다. 물론 미숫가루나 식혜나 콩국도 있었지만, 어린 입맛에 콩국의 깊은 맛을 알 리가 없고, 설탕물이 가져다 주는 쌈빡한 단맛이 단순하게 좋았더랬다.

스페인 남부지역에서 여름을 지날 땐, 오르차타(horchata)를 달고 살았다. 콩을 주원료로 단맛을 첨가해 살짝 발효시킨 아랍식 음료다. 미숫가루와 식혜와 막걸리의 어느 사이에 있는 맛이다. 달고 고소하고 조금 시큼하다. 한마디로 오묘한 맛이다. 그걸 좋아하게 된 것은 맛보다 먼저 소리 때문이었다. 오르차타는 오래된 아이스크림집이나 뚜론(turron)집에서 파는데, 냉동고에 박힌 원형 스테인리스 통에 기다란 국자를 넣고 여러 번 휘저은 다음 유리잔에 따라준다. 소리를 그대로 옮기자면 ‘퉁쫙퉁쫙좌르르’의 반복. 어쩐지 근사하게 전문적이고, 어쩐지 안달나게 만드는 소리다. 옆에서 달디 단 아이스크림을 할짝거리고 있을 때 침을 흘리지 않을 수 있는 것도 다 그 소리 덕분이다. 곧 더 근사하게 맛있는 걸 먹게 될 거라는 어떤 우쭐함. 오르차타도 역시 세 모금쯤 단번에 빨아 마시고 난 다음 천천히 그 맛을 음미할 수 있다.

설탕물과 오르차타의 공통점 중 하나는 이상하게 금세 배가 고파진다는 점이다. 콩국수나 냉면처럼 시원하면서도 든든한 음식이 필요하다면 가스파초(gazpacho)를 먹을 일이다. 가스파초는 토마토 오이 파프리카 등의 채소에 올리브유와 식초를 넣고 갈아먹는 냉스프다. 멜론이나 체리 같은 과일로도 만드는데 빵과 올리브유와 식초는 반드시 들어간다. 토마토를 기본으로 한 가스파초에 굳은 빵을 더 많이 넣으면 좀더 걸쭉한 냉스프 살모레호(salmorejo)가 된다. 토핑으로 계란과 하몽을 얹으면 한 끼 식사로도 손색이 없다.

붉은 가스파초의 흰 버전이 아호블랑코(ajoblanco)다. 채소 대신 잣이나 아몬드 같은 견과류를 기본으로 만드는데, 아몬드를 하루 불려 일일이 껍질을 벗기는 공정도 공정이거니와, 빵 껍질은 다 버리고 흰 속살만 넣어서 우윳빛을 만들어내는 사치스러움에다, 고명으로 청포도를 얹어 만들어낸 어여쁜 조화까지, 그야말로 가스파초 중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아호블랑코 맛의 균형을 잡아주는 것은 다름 아닌 마늘이다. 마늘 특유한 맛과 향이 견과류의 고소함과 화이트와인식초의 새콤함을 꽉 잡아준다. 그래서 이름도 흰아몬드가 아니라 흰마늘. 이 차가운 스프는 거의 다 먹어갈 때 소리가 난다. 남은 스프를 싹싹 긁어모으는 숟가락 소리.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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