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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세상보기] 미움의 기능과 부작용

입력
2017.05.26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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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를 기다리며 대합실에 앉아있다가 우연히 노인 세 명의 대화를 듣게 됐다. 두 사람은 일행이고 다른 한 사람은 낯선 사람인 모양이었다. 의자 위에 짐을 올려놓네 마네 하며 옥신각신하던 그들은 TV에서 교통사고 소식이 나오자 갑자기 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 운전자가 얼마나 나쁜 사람인지, 요즘 사람들이 얼마나 위험하게 운전하는지를 말하며, 그들은 어느새 나란히 앉아있었다.

세 노인의 기묘한 연합은 TV가 전직 대통령의 재판 소식을 전할 때 절정에 달했다. 지난 대선 때 서로 다른 후보를 찍었다는 그들은 능숙하게 그 이야기를 대화 주제에서 밀어내고 다만 전직 대통령의 친구가 얼마나 염치 없는 사람인지, 지난 몇 년 동안 나라 꼴이 얼마나 망가졌는지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다. 그리고는 조금 전까지 자리다툼을 하던 세 사람은 곧 보온병 뚜껑 하나로 사이 좋게 커피를 나눠 마시는 사이가 되었다.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미움이 주는 선물을 생각하곤 한다. 사람들은 어떤 대상을 함께 미워함으로써 동질감과 연대의식을 느낀다. 같은 대상을 좋아하는 사람과는 몫을 나누어야 하고 같은 목표를 추구하는 사람과는 경쟁을 해야 한다. 하지만 같은 대상을 미워하는 사람과는 아무런 조건 없이 ‘우리 편’이 될 수 있다. 그 효과는 매우 강력해서 미움이야말로 무리 짓기의 원천이라 말해도 좋을 정도다. 역사를 통틀어 미움을 공유하지 않고도 지속 가능했던 집단은 그다지 많지 않다.

가령 어떤 스타를 그저 좋아할 뿐인 팬클럽보다는 그 스타의 경쟁자나 박해자로 간주되는 타인을 미워하는 팬클럽이 훨씬 강하게 결속하며 오래 남는다. 어느 정치인을 지지하는 집단이나 단체도 마찬가지고 이용자가 모이는 인터넷 게시판도 마찬가지다. 심지어는 특정한 의류브랜드를 선호하는 그룹이나 조촐한 스터디 모임마저도 그러하다. 어떤 집단이든 미움을 퍼부을 수 있는 분명한 적이 외부에 있을 때 가장 굳건한 무리를 이룬다.

많은 경우 미움이 거셀수록 구성원들이 가지는 소속감도 커지는 것으로 보인다. 외부에 대한 미움과 집단에 대한 소속감 가운데 무엇이 먼저인지는 알 수 없으나 두 감정이 밀접하게 연결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스스로를 애국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애국심을 더 많이 느낄수록 타국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열광적인 종교 신자가 종종 다른 종교나 세속적인 문화에 적대감을 품는 것도 같은 이유다. 이때 미움을 공개적으로 표현하는 행위는 자기 집단에 대한 절개나 충실함을 증명하고 싶기 때문일 게다.

멀쩡한 사람이라면 이유 없는 미움을 받아들이지 않을 터이므로 거기에는 반드시 합당한 이유가 필요하다. 가장 좋은 방법은 그 미움을 불의를 교정하기 위한 정의로운 실천이나 억압에 맞선 저항으로 포장하는 것이다. 때로 그것은 실제 긍정적인 변화의 동력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미워하기로 작정한 대상에게 그럴만한 합당한 이유가 없을 경우, 미움을 퍼트리는 사람들은 대상의 사소한 결점이라도 털어내며 심하면 거짓을 지어내기도 한다. 집단이 주는 소속감이나 정체성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다.

사람이 사회적 동물이라면 미움의 기능은 곧 집단화 기능이다. 미워하던 대상이 알고 보니 죄가 없었음이 밝혀지거나 혹은 대수롭지 않은 죄가 있었더라도 사과를 해버리면 그 기능은 깨진다. 그럴 때 오히려 더 격렬한 미움이 나타나는 까닭은 결백함의 증명이나 사과가 무리의 결속을 해하기 때문이다. 객관적 사실보다 결속의 유지가 우선이 되면 억울하게 미움 받는 사람이 생기는 부작용이 있다. 그럼에도 미움이 늘어나는 원인은 사회가 주는 안정된 공동체 감각이 사라진 탓에 사람들이 어떻게든 다시 집단에 소속되고 싶어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럴 때는 외부의 더 큰 적, 예를 들면 외계인이나 오징어대왕을 불러내야 할까?

손이상 문화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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