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년 뒤 사람들은 시를 읽을까, 읽지 않을까? 백 년 뒤의 미래 세상이 어떤 모습일지 나는 쉽게 상상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이 시를 읽을지 읽지 않을지도 언뜻 짐작되지 않는다. 아니 꼭 이분법적으로 시를 읽는다, 안 읽는다고 답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시나 노래나 그림 같은 오래된 예술은 그때에는 새로운 형태의 예술로 바뀌어 있을 것이라고 답할 수도 있을 것이다.

김은영의 ‘우주에서 읽는 시’는 백 년 뒤 사람들은 ‘시를 읽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리며 상상을 펼친다. 시를 읽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시의 ‘감동’을 잊어버린 것은 아니다. ‘스타워즈’나 ‘아바타’ 등 SF 영화에서 보았듯이 우주여행이 보편화된 시대가 와서, 사람들은 “우주여행 다니느라/시집 한 권의 감동을/알약으로 먹는다.” 아마 한 끼 식사도 알약 하나로, 베토벤의 교향곡도 알약 하나로, 윤동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도 알약 하나로 해결할 것이다. “진공 포장한 고농축 알약/일년에 한 알만 먹으면 끝”이라는 것은 알약 하나에 수많은 예술의 감동을 ‘고농축’할 수 있다는 선언이다.

그러면 이 동시가 상상한 미래 사회는 예술에서 얻을 수 있는 감동까지 알약으로 흡수하며 우주의 여러 별들을 여행 다니는 ‘멋진 신세계’인 것일까. 일차적으로는 그렇게 감상할 수 있다. 그렇지만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 의문이 든다. ‘진공 포장한 고농축 알약’, ‘일 년에 한 알만 먹으면 끝’이라는 표현에서 한 편의 시, 한 권의 시집을 자기만의 시간을 내어 내밀하게 감상함으로써 얻는 감동을 떠올리기는 어렵다. 그래서 ‘알약이 시집을 대신해?’, ‘시집 읽은 감동을 농축 포장해?’ 하는 반문이 떠오르고, 시집 읽는 즐거움과 감동을 알약이 온전히 대신해 주지는 못할 것임을 깨닫게 된다.

작년부터 출판계에 불고 있는 초판본 시집 복각(復刻) 열풍은 근 백 년 전에 나온 ‘진달래꽃’(김소월), ‘님의 침묵’(한용운)도 불러냈다. 오래 전에 나온 시집의 물성(物性)까지 음미하며 시를 감상하려는 독자들의 관심이 뜨거웠다. 과연 제대로 준비해서 의미 있는 출판을 한 경우가 얼마나 되는지, 지금 세대가 시를 감상하기에 적절한 판본들인지 따져 볼 일이지만 그 배경엔 ‘디지털 감성’이나 ‘알약’이 대신할 수 없는 것을 찾는 욕구가 작용했다. 백 년 뒤에도 어떤 사람들은 백 년 전에 나온, 즉 요즘에 나온 심금을 울리는 시집을 일부러 챙겨서 우주선에서 펼쳐 보지 않을까.

김이구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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