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5년의 일이다. 왕의 사촌형제들이 궁녀를 불러 몇 달간 동거하다가 발각됐다. 실록에는 왕의 사촌형제가 궁녀와 한방에 있었으며 술을 돌리고 희롱하였고 궁녀에게 일어나 춤추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외에 정확히 무슨 일을 벌였는지는 모른다. 그들의 죄가 사람의 도리를 몹시 벗어난 것이라는 간관들의 말을 통해 일의 전말을 추측할 뿐이다. 그 기록되지 않은 범행에 대해, 왕은 사촌형제들의 죄를 감하여 적당히 귀양 보내거나 용서했다. 그러나 옥에 가두었던 궁녀는 후일 참수하고 궁녀의 부모와 가족들까지 죄를 연좌했다.

이 사건은 12년 후 다른 일로 이어진다. 왕은 사건의 공범이었던 두 명의 사촌형제에게 각각 정3품의 작위를 내렸다. 신하들이 12년 전 사건을 들어 반대했으나 왕은 모든 상소를 물리쳤다. 보다 못한 대사헌 이계린이 궐에 들어와, 범죄자에게 벼슬을 주다니 옳은 처사가 아니라며 꼼짝하지 않았다. 그러자 왕은 그를 관찰사로 삼아 황해도로 보내버렸다.

이 일이 또 다른 사건으로 이어졌다. 몇 달 만에 돌아온 이계린이 급히 구황을 청하며 보고하기를, 해주의 기근이 너무 심하여 사람의 고기를 먹은 사람도 있다 했다. 놀란 왕은 그 해괴한 이야기를 누구에게 들었냐고 캐물었다. 몇 단계를 거쳐 이계린의 외조카가 불려왔다. 그는 굶주린 소경 여자가 굶어 죽은 자식의 시체를 먹었다고 증언했다. 그런데 그에게 이야기를 전한 해주사람은 소경 여자가 아니라 소경의 딸이라고 증언했다. 왕은 그들의 이야기가 서로 다르다며 요언죄로 처벌하고 이계린의 관직을 박탈했다. 왕이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 따로 어찌하였다는 기록은 없다.

이 사건에 관해 실록에는 “몇 해에 걸친 흉년으로 황해도에 죽은 사람이 넘치는 것이 사실인데, 백성을 구제하기는커녕 말을 전한 사람을 모함해 언로를 막다니 이를 어찌하는가?”라는 한탄이 실려있다(1448년 1월 20일자). 누군지 알 수 없는 역사기록자의 한탄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여러 사람의 검수를 거쳐야 정본이 되는 바, 검수를 맡았던 당대의 지식인들이 왕과 조정 중신들을 어떻게 평가했는지가 이 한 문장을 통해 드러난다.

그 왕의 치세에는 문서를 조작해 민간인을 노비로 만드는 압량위천(壓良爲賤)도 성행했다. 어느 압량꾼은 처벌을 피하려고 고관대작과 임금의 친인척들을 대량의 노비로 매수했다. 그 일이 알려지자 왕은 측근과 친척들에게 경미한 처벌을 내렸을 따름으로, 억울하게 노비가 된 사람들이 해방됐는지 여부는 모른다. 나아가 왕의 형님은 이따금씩 길에서 사람을 납치해 노비로 삼곤 했는데 왕은 그마저도 눈감아주었다. 오늘의 관점에서는 있을 수 없는 폭정이 그때는 태연하게 벌어졌다.

오래 전의 역사와 후대의 기억은 서로 사맛디 아니하다. 사람들은 떠올리기 싫은 억압의 역사보다 영광스런 이미지를 더 좋아하는 법이다. 예컨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백성을 가혹한 노역에 몰아넣어 결국 나라를 쪼개지게 만든 왕을 지혜로운 왕으로 기억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어느 왕의 폭정을 모두 잊고 그를 성군으로 기린다. 솔로몬이 예루살렘의 건설자라는 점 때문에 다시 발명될 필요가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흡사한 필요성 때문에 어느 왕에게 성군의 이미지를 부여했다.

두 명의 대통령 후보가 ‘닮은 꼴 리더십’으로 꼽은 그 왕이 실제로는 꽤 나빴다는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그는 쿠데타로 권력을 쥔 그의 아버지나 아들보다는 정통성이 있었고, 조선의 다른 왕들보다는 조금 덜 잔인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봉건체제의 군주였으며 그러한 자기 역할에 충실했다. 왕이 없는 민주주의에는 폭군은 물론이요 성군도 알맞지 않다. 오늘날 정치 지도자의 역할은 왕이 아니며 후대 사람들이 좋아하기 위한 물신의 대상도 아니므로, 발명된 성군은 대통령의 모델이 될 수 없다.

손이상 문화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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