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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진의 입기,읽기] 패션이 보내는 정치적 메시지

입력
2017.04.19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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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산업이 앞장서서 연대의 힘을 보여주자는 취지의 ‘#TiedTogether 캠페인’의 상징인 반다나. 출처 https://tiedtogether.businessoffashion.com/
패션 산업이 앞장서서 연대의 힘을 보여주자는 취지의 ‘#TiedTogether 캠페인’의 상징인 반다나. 출처 https://tiedtogether.businessoffashion.com/

봄에 열린 미국 뉴욕, 영국 런던, 이탈리아 밀라노, 프랑스 파리의 2017 가을ㆍ겨울(F/W) 컬렉션엔 그 어느 때보다도 정치적 메시지가 가득했다. 등장한 이야기는 인류애와 성소수자, 페미니즘, 유색 인종, 이민자에 대한 것 등 다양했다. 요약하자면 ‘혐오를 막고 다름과 함께 잘 살자’였다. 파리와 밀라노의 크리스찬 디오르 쇼에선 페미니즘 메시지를 담은 티셔츠가 등장했고 미쏘니 쇼에서는 여성 행진과 연대를 표시하는 핑크 푸시햇 캠페인이 열렸다. 뉴욕 패션위크의 정치적 경향은 훨씬 강했다. 도널드 트럼프 집권 이후 미국에서 이런 이슈를 둘러싼 불안이 커지고 있어서다.

예를 들어 프라발 그룽은 “우리는 침묵하지 않겠다”“나는 이민자다” 등을 적은 티셔츠 시리즈를 선보였다. 퍼블릭 스쿨은 “우리에겐 리더가 필요하다"는 문구가 적힌 재킷 등으로 트럼프의 정책을 비판했고, 크리스찬 시리아노는 티셔츠에 “People are People”이라는 문구를 적어 인권 메시지를 전했다. 제레미 스콧의 패션쇼에도 “우리의 목소리가 우리를 보호할 수 있는 모든 것"이라는 문구가 쓰인 옷이 등장했고, 스태프들은 미국 상원의원 명단과 전화번호가 적힌 티셔츠를 입고 나왔다.

더 큰 규모로 전개된 캠페인도 있었다. 패션 산업이 앞장서서 연대의 힘을 보여 주자는 취지의 ‘#TiedTogether 캠페인’은 4대 메인 패션쇼를 거쳐 세계 곳곳에서 열리는 패션위크에서 진행 중이다. 토미 힐피거 패션쇼에서 모델들이 이 캠페인을 상징하는 반다나를 들고 나왔고,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와 도나텔라 베르사체 등 디자이너도 반다나를 손목에 착용하고 패션쇼 피날레에 등장하거나 사진을 찍어 올렸다.

뉴욕 패션위크를 운영하는 미국패션디자인협회(CFDA)는 여성의 낙태 결정권을 주장하는 미국의 비정부기구(NGO) 플랜드 페어런트후드(Planned Parenthood)와 협력해 핑크 리본을 다는 캠페인을 펼쳤다. 여기에도 미국 패션지 보그의 편집장 안나 윈투어와 디자이너 다이앤 폰 퍼스텐버그 등 유수의 패션계 인사들이 함께 했다.

크리스찬 디오르 2017 S/S 컬렉션에 오른 슬로건 티.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We Should All Be Feminists)"는 문장이 또렷하다. 크리스찬 디오르 홈페이지
크리스찬 디오르 2017 S/S 컬렉션에 오른 슬로건 티.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We Should All Be Feminists)"는 문장이 또렷하다. 크리스찬 디오르 홈페이지

사실 고급 패션계에선 정치적인 발언을 잘 하지 않는 편이다. 비싼 옷을 사는 고객은 기득권자인 경우가 많다. 이들은 지금 세상의 상태에서 부와 권력을 누리고 있으므로 세상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좋아질 일이 별로 없다. 패션 브랜드 입장에서도 이런 고객의 뜻을 일부러 거스르고 싶어하지 않는다.

물론 패션과 정치는 다양한 방식으로 결합해 왔다. 하지만 티셔츠에 뭔가를 쓰는 방식은 아니었다. 기성 문화에 대한 반항을 담은 청바지나 반전 메시지를 담은 히피들의 군용 재킷은 과거 기성 중산층이 입지 않는 노동자와 군인 등의 옷이었기 때문에 그 자체로 메시지가 될 수 있었다. 영국 하위 문화의 스킨헤드족과 모드족 등은 입은 옷만 봐도 구별할 수 있을 정도로 서로 달랐지만, 역시 의식적으로 선택한 옷으로 만들어진 문화였다. 굳이 티셔츠 앞에 “나는 모드” “나는 스킨헤드” 같은 말을 쓸 필요가 없었다.

지금의 방식은 패션보다는 NGO의 캠페인에 가깝다. 옷에 직접적인 메시지를 적는 방식을 사용하게 된 것에는 우아한 은유의 방식을 사용하기에는 현실의 움직임이 너무 급박하다는 점이 작용했을 것이다. 또 패션계에서 이런 옷을 입게 만들어 참여를 촉구하려는 의도이기도 하다. 비싼 옷을 연예인이나 트렌드 리더 등이 입으면 언론과 인터넷 등으로 노출되면서 적혀 있는 메시지를 순식간에 세계에 알릴 수 있다.

며칠 전 미국 유나이티드항공 기내에서 폭력적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대한 뉴스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나오는 여러 반응에서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인종과 이민자 등 문제에 대해 편견과 무감각의 기반 위에 놓여 있는 걸 볼 수 있다. 피해자의 변호인이 인종적 사건으로 취급되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이 부분은 논외로 친다고 해도 말이다. 우리 사회에서도 같은 편견의 흔적을 자주 목격할 수 있다.

디자이너들이 이번 패션위크에서 세계에 보내려 한 메시지는 유효하고 해결해야만 하는 중대한 문제를 담고 있다. 또한 ‘People are People’ 같은 문구가 적혀 있는 티셔츠를 입는 게 좋은 일이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분명하다.

패션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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