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루 드 프랑스에서 한 흑인 선수가 백인 선수들 사이에서 언덕을 오르고 있다. UCI 유튜브

이런 문답을 본 적이 있다. ‘흑인들의 신체능력이 뛰어난 걸로 알려져 있는데 왜 수영선수는 드물까?’ 답은 ‘흑인들이 수영을 못하게 타고 났다’는 것이다. 이런 식이다. ‘흑인은 선천적으로 다른 인종에 비해 근육량이 많은데다 근육의 밀도까지 높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몸이 물속에 많이 가라앉고, 따라서 저항을 많이 받아 앞으로 나아가기 힘들다.’ 이런 설명은 광범위하게 퍼져 있고, 언론매체에서 종종 소개되기도 한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시즌에 출고된 『중앙일보』의 기사 ‘[올림픽 알면 재밌다] 흑인 수영선수는 왜 드물까’를 보면, 흑인 수영 선수가 드문 이유로 크게 생물학적 이유와 경제적 이유를 꼽고 있다. 경제적 이유는 수영이 돈벌이가 안되는 종목이라 흑인들이 택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고, 생물학적 이유는 앞서 서술한 ‘근육 밀도’ 운운하는 이야기다.

근육 밀도 때문에 흑인이 물에 잘 가라앉고 그래서 수영을 못한다는 설명은 ‘과학적’으로 느껴지고 뭔가 그럴듯해 보인다. 사실일까? 한 가지 확실한 건 이와 관련, 신뢰할만한 어떤 연구나 논문도 실존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영국 BBC는 어느 보도에서 이 가설이 잘못된 과학 지식이라 단언한 적이 있고, 나도 직접 찾아봤지만 도무지 근거를 찾을 수 없었다. 즉, 이건 도시전설 같은 이야기다. 실제로 흑인 수영선수가 적은 건 맞다. 수영 종목에서 흑인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는 앤서니 네스티(Anthony Nesty)로, 1988년 서울 올림픽 접영 100미터에서 1위를 했다. 네스티 이전에는 정말로 흑인 수영 선수가 극히 드물었다고 한다. 흑인 신체가 수영에 부적합해서가 아니라, 사회적‧역사적 이유 때문이다.

흑인 최초 올림픽 수영 금메달리스트 앤서니 네스티

특히 미국의 경우 노예제가 있던 시절에는 배에서 탈출할 위험이 있다는 이유에서 흑인들의 수영이 금지되었다(원래 서아프리카의 흑인들은 백인들보다 훨씬 더 수영을 잘했다고 한다). 노예 제도가 폐지된 이후에도 흑인들은 또다시 수영을 배울 기회를 잃게 된다. 그들이 자유롭게 수영을 배울 수 있는 공간, 예컨대 체서피크에서 미시시피에 이르는 소위 ‘검은 해변’이 인종차별적인 사업가와 정치가들에 의해 백인 소유지로 바뀌어버렸기 때문이다. 1950년대가 되어 수영이 스포츠로 큰 인기를 얻었지만, 당시는 인종차별과 분리정책이 극성이던 무렵이라 흑인들은 체계적으로 수영장 시설에 접근 자체가 불허됐고, 당연히 수영을 배울 기회도 없었다. 수영을 하지 못하는 부모들은 자녀들에게도 수영을 배우게 하지 않는 경향이 강하므로 지금까지 그 영향이 이어지게 되었다. 그러니까 미국의 흑인들은 거의 2백년 역사에 걸쳐서 하나의 스포츠이자 귀중한 인명구조기술인 수영에서 배제당해 왔던 셈이다(Andrew W. Kahrl, 『The Land Was Ours』, 2012). 인종차별주의자들은 그런 역사는 싹 묻어둔 채, 흑인은 근육밀도가 높아서 물에 잘 가라앉는다는 낭설을 퍼뜨려왔다.

이제 칼럼의 주제로 돌아와서, 자전거 얘기를 해보자. 외국의 유명한 사이클 경기를 보다보면 당신은 이내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된다. 거의 전부가 백인들이고 아시아계가 아주 조금 섞여 있다. 흑인은 거의 없다. 110년이 넘는 역사의 투르 드 프랑스에 흑인 선수가 최초로 출전한 건 2011년이 되어서였다. 프랑스 국적의 요안 젠(Yohann Gène) 선수는 이 역사적 사건으로 『타임』에 실렸다. 2015년 투르에서는 에리트레아 출신의 다니엘 테클라헤이마놋(Daniel Teklehaimanot)이 드디어 최초의 산악왕 저지를 입는 감격을 맛보았다. 산악왕 저지란 빨간 점이 여러 개 찍혀 있는 저지로, 오르막 구간을 제일 빨리 오른 선수에게 주어진다. 아프리카 최빈국 출신의 이 흑인 선수가 쟁쟁한 백인 선수들을 제치며 대활약하는 모습에 세계 사이클링 팬들이 환호했음은 물론이다.

투르 드 프랑스 최초의 흑인 선수 요안 젠

어쨌든 아주 최근 들어서야 유명 사이클 경기에 흑인 선수들이 조금씩 등장하기 시작했다. 사이클 커뮤니티에서는 ‘왜 흑인 사이클 선수가 드물까’라는 주제로 토론이 벌어지기도 하는데, 다행히 ‘흑인 신체가 사이클에 부적합해서’ 류의 이야기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대체로 사회경제적 이유를 꼽는 사람들이 많다. 흑인의 경우 유럽에서나 미국에서다 대체로 백인 등에 비해 빈곤층 비율이 높고, 사이클이라는 스포츠에 대한 접근 기회 자체가 적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아프리카 국가들의 경우 자전거 장비 이전에 도로 등의 인프라 자체가 미흡한 경우도 적지 않다. 장비나 훈련에 들이는 노력에 비해 프로선수가 되어도 벌이가 시원찮다는 점도 지적된다. 대자본이 흥청대는 초 메이저 스포츠, 이를테면 축구나 농구 등에서 흑인 선수들이 대활약하는 것을 보면 그럴듯하게 들리기도 한다. 다만 흑인의 신체능력에 대한 폄하만이 아니라 과도한 신비화 역시 인종주의의 한 양태라는 것을 덧붙여 두기로 한다.

2015년 투르에서 돌풍을 일으킨 다니엘 테클라헤이마놋

19세기에는 자전거를 타던 여성들을 향해 온갖 마타도어와 차별 발언이 쏟아졌었다. 여성들이 자전거를 타기 쉽게 만들어진 ‘블루머’라는 바지를 입기 시작하자 남성들은 자전거를 타면 불임이 된다느니, 성적으로 문란하다는 증거라느니 하는, 말도 안되는 소리를 늘어놓으며 자전거 타는 여성을 백안시했다. 소수자는 단지 소수자라는 이유로 편견의 대상이 된다. 여성이 그랬고, 흑인이 그랬다. “능력의 차이”라는 말은 그래서 늘 위험천만하다. 현재의 지위나 상태를 기준으로 역량을 평가하기 때문에 그 지위나 상태가 어떤 사회구조 속에서 형성되었는지가 은폐되기 쉽다. 자전거, 아니 모든 스포츠는 불평등하다. 타고난 재능의 차이 때문에 불평등한 게 아니라, 불평등한 세계가 고스란히 반영되기 때문에 불평등하다.

프리랜스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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