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라에서 여성으로 살아가고 있다면 듣자마자 이해할 수 있는 말이 있다. 이번에는 “물이었으니 천만다행”이라는 말이었다. 서울의 한 대학교에서 한 남학생이 ‘여학생들이 공부는 안 하고 돌아다니는 게 기분 나쁘다’는 이유로 물과 콜라를 뿌리고 다녔고, 이 과정에서 물을 맞은 여학생이 말한 것이다. 여성들은 알 것이다. 이 말은 곧 염산이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말이라는 것을. 한 기사에서 인용된 문장을 읽는 순간, 피해자의 마음이 이해됐고, 이내 바로 이해된다는 사실이 씁쓸하게 느껴졌다. 염산이 아니라서 다행이라니, 어쩌다가 우리는 남성이 여성에게 무언가를 뿌렸다고 했을 때 바로 염산은 아닐까 염려하게 된 것일까. 그 이유는 ‘염산 테러’ 혹은 ‘염산 이별’ 등으로만 검색해 보아도 바로 알 수 있다. 이어지는 데이트 폭력을 견디지 못해 이별을 고한 여자친구에게 헤어질 수 없다며 염산을 뿌리고, 과거 성폭행했던 여성을 찾아가 신고했다며 염산을 뿌린 남자들에 대한 기사가 쏟아진다. 이런 사회에서는 어떤 남자가 내게 무엇인가 뿌렸는데 그게 염산이 아니라면, 다행이라고밖에 말하게 되는 것이다.

얼마 전 걸그룹 여자친구의 팬 사인회에 한 남성이 몰래 카메라가 부착된 안경을 착용하고 나타나 한 멤버가 그것을 눈치챈 사건이 있었다. 이 일이 SNS를 통해 알려지면서 몰래 카메라의 다양한 형태 또한 함께 알려졌다. 안경은 우습다.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스마트폰 보조 배터리 케이스, USB, 모자, 블루투스 이어폰, 컵과 손목시계까지 카메라는 어디든 ‘몰래’ 숨을 수 있다.

예능 프로그램식 작명법의 폐해로 귀여운 어감으로 불리는 바람에 종종 그 심각성이 간과되는 경향이 있지만, 상대가 인지하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의 불법 촬영은 분명 범죄다. 하지만 이 또한 얼마나 만연해 있는지 놀라울 지경이다. 누구나 인터넷에서 사물 형태의 몰래 카메라를 구해 타인의 사생활을 동영상으로 촬영할 수 있다. 이 몰래 카메라로 촬영되는 영상의 대부분이 범죄의 증거물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특히 유포되는 영상의 상당수가 디지털 성범죄에 해당하는 것임은 굳이 덧붙이지 않아도 알 것이다.

몰래 카메라를 검색했을 때 쇼핑몰 제품의 상당수가 몰래 카메라 탐지기인 것 역시, 불법 촬영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반증한다. 일상의 몰래 카메라는 “지금까지 몰래 카메라였습니다!”하고 외친 뒤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하는 예능 프로그램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공중 화장실에서, 탈의실과 샤워장에서, 대중교통에서 여성들이 어디서나 겪는 공포이며, 누군가가 매일 꾸는 악몽이다.

2015년 워터파크에서의 몰래 카메라 촬영이 적발되어 사회 문제로 대두된 이후 ‘몰카 판매 금지 법안’에 대한 여론이 있었고, 계속되는 염산 테러로 염산 판매 규제에 대한 여론 역시 꾸준히 존재했다. 하지만 2017년 현재 물을 맞은 여성은 “물이라 다행”이라 생각하며 화를 삭이고, 몰래 카메라를 발견한 걸그룹 멤버는 촬영을 시도한 남성을 끝까지 상냥한 미소로 대해야만 한다. 오늘도 누군가는 어디에 어떤 방식으로 존재할지 모를 몰래 카메라를, 이미 나도 모르는 사이 찍혔을지 모를 사진이나 동영상의 유포를 두려워하고 있을 것이다.

이 두려움은 젊은 여성으로 한국에 살고 있는 내 안에도 물론 도사리고 있다. 이 모든 공포를 없앨 수 있는 방법은 당연히 염산을 뿌리지 않고, 몰래 카메라를 찍지 않는 것이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럴 수 있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물이라서 다행이 아니다. 그래도 몰래 카메라 촬영이 적발되었으니 다행도 아니다. 이대로는 더 많은 피해자가 양산될 수밖에 없다. 더욱 강력한 몰래 카메라 방지 법안이, 염산을 비롯한 독성 약품에 대한 강력한 규제가 필요한 시점이다.

윤이나 프리랜서 마감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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