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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약 뒤집고 위증해도 쉽게 재기… 정치인 거짓말에 관대한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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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약 뒤집고 위증해도 쉽게 재기… 정치인 거짓말에 관대한 한국

입력
2017.04.01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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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트럼프 “오바마에 도청 당해” 거짓말

집권 두 달 만에 지지율 30%대로 뚝

美는 공직자 위증 땐 반드시 응징

#2

우리 “정치인 다 그렇지 뭐” 용서

입장 번복 투명한 해명 없을 땐

유권자들 표로 엄중히 심판해야

빌 클린턴(왼쪽) 전 대통령은 위증을 했다가 탄핵소추됐고, 도널드 트럼프(오른쪽) 대통령은 거짓말 퍼레이드로 자신의 지지율을 30%대로 끌어내렸다. 정치인의 거짓말에 냉정한 미국 정서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AP연합뉴스
빌 클린턴(왼쪽) 전 대통령은 위증을 했다가 탄핵소추됐고, 도널드 트럼프(오른쪽) 대통령은 거짓말 퍼레이드로 자신의 지지율을 30%대로 끌어내렸다. 정치인의 거짓말에 냉정한 미국 정서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AP연합뉴스

인종차별과 성차별, 막말에도 불구하고 46.2%의 득표율로 당선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취임 두 달만에 지지율 30%대로 곤두박질했다. 지지율을 끌어내린 것은 그의 거짓말 퍼레이드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식 날부터 역대 최대 인파가 모였다고 했다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자 ‘대안적 진실’이라고 둘러댄 데 이어 이달 초 아무런 근거도 없이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도청을 했다”고 주장했다 거짓말로 밝혀졌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지난달 23일자 사설에서 “진실에 대한 존중을 보여주지 않으면 대부분 미국인은 그를 가짜 대통령으로 판단할 것”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트럼프의 위기는 공인의 거짓말에 엄격한 미국의 전통을 잘 보여준다. 미국은 위증죄를 탈세만큼 중대한 범죄로 여긴다.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이 탄핵 직전 스스로 물러난 것은

‘워터게이트 사건’을 알고도 부인하다 거짓말인 것이 들통났기 때문이었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탄핵소추된 이유도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섹스스캔들 자체보다, 이와 관련한 위증 때문이었다. 당시 클린턴 대통령과 변호인은 ‘섹스는 하지 않았고 다만 부적절한 관계였다’는 답변을 고집했는데, ‘대통령이 거짓말을 했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불륜보다 거짓말이 더 큰 타격이 되기 때문이다. 마이클 샌델 미 하버드대 교수는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공직자와 정치인의 도덕성은 일반인보다 높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비해 한국의 정치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바꾸고, 국민과의 약속인 공약을 스스로 경시하고, 거짓 해명을 하는 일이 잦다. 역사적으로 가장 대표적인 대통령의 거짓말은 이승만 전 대통령이 1950년 6ㆍ25 전쟁 발발시 먼저 몰래 서울을 빠져 나가고도 온 국민을 속이고 ‘서울 사수’ 방송을 내보낸 것이다. 그러나 그가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것은 10년 뒤 3ㆍ15 부정선거 때문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5ㆍ16쿠데타 뒤 “민간에 정권을 넘길 것”이라 약속해 놓고 끝내 정권을 쥐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87년 대선 당시 임기 2년 후 중간평가를 받겠다 했지만 지키지 않았고, 95년 5,000억원 비자금 조성 및 1,700억원 개인 축재 사실이 드러나기 직전까지 “부정한 돈은 받지 않았다”고 거짓말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 역시 “전 재산은 29만원뿐”이라며 재산 추징을 거부했지만 이후 지난해 7월까지 추징된 금액이 1,140억원에 달한다.

김영삼 전 대통령도 92년 대선 공약으로 “쌀 시장 개방은 대통령직을 걸고라도 막겠다”고 했지만 이를 뒤집었고, 90년 3당 합당 당시 내각제 약속은 시행하지 않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86년 대선 불출마 선언, 92년 정계 은퇴 선언을 번복하고 끝내 대통령직에 올랐고, 역시 내각제 시행 공약을 지키지 않았다.

한국의 유권자들이 은퇴 선언을 번복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당선시킨 것에서 보듯 우리는 정치인의 거짓말에 관대한 편이다. 윤태곤 ‘의제와전략그룹 더모아’ 정치분석실장은 사회 전체적으로 ‘신뢰 자본’이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계약을 중시하는 서구 사회는 약속을 지키면 보상이 있고, 거짓말을 하면 벌을 분명히 받지만 우리는 이것이 불분명하다. 대기업 오너들이 죄 짓고 감옥 갔다 사면 받고 나와 같은 잘못을 되풀이한다. 그래도 별 문제 없다는 분위기가 깔려 있다.”

최근 들어 경선에 불복하거나 철새처럼 탈당을 일삼는 정치인들에 대해서는 지지를 철회하는 등 다소 달라지는 모습이 감지되고는 있다. 그래도 여전히 “정치는 생물”이라며 거짓말을 용납하려는 정치인, “정치인이 다 그렇지”라며 이를 쉽게 용서하는 유권자들의 태도는 문제라는 지적이다. 박구용 전남대 철학과 교수는 “정치인이 상황에 따라 입장을 바꾸는 것 자체를 무작정 비판해서는 안 된다”고 전제하면서도 “다만 입장의 변화를 투명하게 해명하지 않는 정치인, 거짓말을 되풀이하는 정치인에 대해서는 유권자들이 표로 심판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치에 대한 불신만 커지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정치인이나 기업인 등에 대해 같은 잣대를 적용하는 엄중한 사법절차가 정직한 사회를 만드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차정인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31일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구속에 대해 “법원의 구속결정이나 헌법재판소의 탄핵 인용에는 박 전 대통령이 검찰, 특검 조사를 받겠다고 약속했다가 이를 지키지 않은 점이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본다”며 “정치인의 부정과 거짓말에 대해 사법부가 관대하게 판단하지 않아야 정치인의 말과 행동이 얼마나 무거운지를 알게 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박상준 기자 buttonp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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