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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낄낄낄] 우연한 매듭 같은 존재, 삼가하고 또 삼가하라

입력
2017.03.30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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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에서 한국으로 파견 온 가톨릭 신부 휴 맥마흔. 이 서양인에게 집안일을 봐주시는 한국 아주머니의 화법은 무척이나 신기했다. “집에 왜 수건이 없어요?” 물으면 이리 답했다. “그러게요, 수건이 모두 어디로 갔지?” 수프가 너무 식어버렸다 하자 “수프가 왜 안 뜨겁지? 난로 위에 그렇게 오래 있었는데”라고 말했다. 마치 수건이 알아서 남몰래 사라지기라도, 수프가 알아서 남몰래 식어버리기라도 한 듯 말이다.

우리 눈엔 맥마흔 신부의 대응도 아주머니 못지 않게 신기하다. 아주머니의 책임회피라 생각하고 불쾌하게 여길 수도 있는데 1975년에 낸 책에다 이리 써놨다. “한낱 물질적 대상들을 마치 그 자신들의 삶과 의지라도 가진 듯이 대하는 보기 드문 존중의 태도를 볼 수 있다. 현대세계에서는 이 같은 존중의 여지가 남아 있지 않다. (중략) 아주머니가 셰익스피어를 알았다면 이렇게 덧붙였을 것이다. ‘호레이쇼, 하늘과 땅 사이에는 자네의 철학으로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일들이 있다네.’” 아주머니는 무책임한 게 아니라, 사물이 가진 자유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라 해석한 것이다. 맥마흔 신부는 이런 태도를 “미지의 것들에게 양도함”이라 규정짓고, 그것을 ‘하나님의 뜻’이라는 종교적 의미로까지 격상시켰다.

‘독자적인 나만의 철학’을 찾아 헤맨, 입에서 입으로만 알려진 ‘은둔의 철학자’ 박동환 전 연세대 철학과 교수의 책 4권이 선집으로 묶여 나왔다. 절판됐던 1987년작 ‘서양의 논리, 동양의 마음’, 1993년작 ‘동양의 논리는 어디에 있는가’에다가 2001년작 ‘안티 호모에렉투스’, 그리고 그 이후 글들을 모은 ‘x의 존재론’까지다. 노철학자의 마지막 결과물이라 할 수 있는 선집을 앞에 두고 낄낄거리긴 뭣한데, 읽다 보면 그래도 낄낄댈 수 밖에 없다. 번역하면 논지가 사라진다며 영어논문 원문을 그대로 턱 하니 실어놓은 것 하며, 자신을 지우기 위해 자기 이름을 ‘ㅂ ㄷ’이라 표기해둔 것하며, 각 권의 머리말 삼아 네 차례 나눠 실어둔 ‘한 조각의 철학적 회고’에서 드러나는 진리에 대한 욕망까지. 왜 주변인들이 박동환 이름 석자를 못 잊어 하는지 짐작하게 한다.

맥마흔 신부 얘기는 최신작이랄 수 있는 ‘x의 존재론’에 있다. 저자는 우주 생성 이래 억겁의 세월이 맺는 하나의 매듭이 바로 ‘나’이고 이걸 x라 부른다. 이 x의 존재양식은 Xx, ~x, X(x&~x)로 나타난다. 머리가 지끈지끈해지기 전에 이를 각각 플라톤, 카프카, 구약의 ‘전도서, 그러니까 철학, 문학(예술), 종교로 대비시켜 풀어나가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빠른 이해를 위해서는 x에다 유전자를 대입하면 되는데 실제 저자가 주요 생물학 논의를 많이 인용할 뿐 아니라 읽다 보면 스티븐 제이 굴드의 단속평형설이나 노벨상을 받은 분자생물학자 자크 모노의 ‘우연과 필연’, 요즘 유행하는 빅 히스토리까지 떠올릴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저자는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의 이 말을 인용해뒀다. “세계가 시작하였을 때 인류는 존재하지 않았고, 세계가 끝날 때에도 인류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글쎄, 딱 떠오르는 모습은 엉거주춤 한걸음 뒤로 물러나는 제스처다. 그걸 ‘탈주체’라 하건, ‘탈인간’이라 하건, ‘포스트모던’이라 하건, ‘생태철학’이라 하건 간에 말이다. 그 무슨 대단한 이름을 붙일 수 없어 미지수 x를 쓰고야 말았듯, 정작 박동환 그 자신은 탈주체, 생태철학 같은 말을 들이밀면 다시 한번 엉거주춤 한 걸음 뒤로 더 물러나겠지만. 억겁의 시간 속에서 우연히 발생한 하나의 매듭으로서, 엉거주춤 뒤로 물러남은 그 자체가 하나의 윤리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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