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최인철의 프레임] 여행하는 자가 누리는 삶의 품격

입력
2017.03.23 11:04
0 0

어떤 여행은 인생을 바꾼다. 화가 파울 클레에게는 1914년 아프리카 튀니지로 떠난 2주간의 여행이 그랬다. 그 짧은 여행 기간 동안 클레는 무려 35점의 수채화와 13점의 데생을 그렸다고 한다. 영감의 유성우 (流星雨)가 쏟아져 내린 셈이다. 그때의 영감은 클레의 삶에 거쳐 지속적인 영향을 주어 여행에서 돌아온 지 20여년이 흐른 후에도 튀니지 여행과 관련한 20여 편의 작품을 더 만들어내는 원동력이 됐다.

여행이 다작만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여행의 경험은 더 나은 작품을 만들어내는 힘도 있다. 1850년부터 1945년 사이에 태어난 피카소, 클레, 칸딘스키, 워홀, 고흐 등 이름만 들어도 소름이 돋는 모던 아트의 슈퍼스타 214명의 생애와 그들의 작품 경매가를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같은 화가의 작품이라 할지라도 여행 중에 그린 작품의 경매가는 일상 시기에 그린 작품보다 평균 7% 정도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매해 기록을 경신하는 이들 미술품의 경매가를 감안하면 7%는 어마어마한 차이다.

새롭고 낯선 환경을 ‘의도적’으로 접하려는 노력의 대가가 작가 개인에게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역사적으로도 외부와의 접촉을 의도적으로 차단하고 지나치게 동질적인 문화를 추구했던 사회일수록 지식과 예술의 침체기를 겪어왔다. 반면 외부와의 접촉을 활발하게 시도했던 사회는 새로운 사상과 예술을 역사에 남겼다.

외부 세계에 대한 개방성이 문화 발달에 끼치는 영향은 가까이에 있는 일본을 분석한 연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580년에서 1939년 사이에 일본에서 이름을 떨친 사람들을 대상으로 그들이 외국에서 공부한 적이 있는지, 외국인 스승을 둔 적이 있는지, 외국 여행을 한 적이 있는지, 그리고 같은 시기에 일본을 방문한 유명한 외국인이 있는지 등 일본이 각 시기별로 외국 문화에 얼마나 개방적이었는지를 조사한 연구가 있었다. 그리고 이 연구는 외국 문화와의 접촉 정도가 각 시기별로 예술, 사상, 의학 등 다양한 영역에서 이룬 일본의 성취 수준과 어떤 관계를 보이는지를 분석했는데, 그 결과 문화 개방성이 일본의 성취 수준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발견했다.

이 연구는 한발 더 나아가 그 효과가 세대를 걸쳐서 나타날 수 있다는 결과도 얻어냈다. 다시 말해, 현 세대의 문화 개방성이 후속 세대의 성취에 중요한 밑거름이 될 수 있음을 알아낸 것이다. 세계적으로 자국 중심주의의 광풍이 몰아치고 있는 요즘 세태에 경종을 울리는 연구라고 할 수 있다. 폐쇄적인 사람들끼리의 폐쇄적인 교류가 빚어낸 수치를 경험한 우리에게는 유독 더 그러하다.

개방성(Openness). 심리학에서는 이를 “한 개인의 정신적 그리고 경험적 삶의 넓이와 깊이, 그리고 독창성과 복잡성”이라고 정의한다. 의식의 개방성과 경험의 개방성, 인간의 품격을 판단하는 데 이만한 잣대도 없다. 편협한 사고, 외부 세계와의 단절, 새로운 사상과 예술에 대한 무관심, 동일성에 대한 압력은 우리의 정신을 폐쇄적으로 만든다. 그런 조직과 사회에서 혁신적인 성과가 나오기는 쉽지 않다. 물론 애초에 개방적인 사람이 외부 세계와의 접촉을 더 시도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연구 결과들은 외부 세계와의 접촉이 거꾸로 우리 안의 개방성과 창의성을 불러일으킨다는 점도 명확히 보여준다. 이주한 과학자들의 연구가 본토 과학자들의 연구보다 더 독창적이라는 연구도 이를 뒷받침한다.

당장의 편안함을 위해서는 친숙한 환경에서 비슷한 사람들과 유사한 경험을 반복하는 것이 좋다. 예측 가능한 세상이 주는 안락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곳에는 ‘도시의 공기’가 없다. 중세 농노들이 도시로 도주하거나 이주하여 느꼈던 자유과 경쟁과 개성의 공기가 없다. 파격을 꿈꾸고 새로운 사상에 마음을 여는 것을 장려하는 공기가 없는 것이다.

여행과 이주를 보는 우리의 프레임을 바꿔야 한다. 여행과 이주는 단순한 레저나 생계를 위한 고육지책만이 아니다. 그것은 개인에게는 확장된 자아, 개방적 자아를 심어주는 일이고, 사회에게는 미래를 위한 장기 투자이다. 무엇보다 삶의 품격을 세우는 일이다.

이동을 꿈꿔야 한다. 소수를 품어 안고, 다양성을 추구해야 한다. 다수의 힘으로 소수, 이주자, 이단아를 단죄하여, 동질성만을 추구하는 어리석음을 멈춰야 한다. 이사를 하든지, 제3의 공간을 만들든지, 여행을 하든지, 하다못해 다른 기관으로 출장이라도 가야 한다. ‘이주하는 자의 이점 (The mover’s advantage)’이라는 어떤 논문의 제목처럼 이동하는 자, 여행하는 자에게는 열린 의식이라는 분명한 이점이 있다.

최인철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