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한 당신] 살로메 카르와

살로메 카르와는 라이베리아 내전이 발발한 1989년 태어나 긴 내전 동안 살아남았고, 2014년 에볼라 사태 때도 감염을 딛고 살아남아 다른 환자를 돌본, 자칭 '슈퍼 파워스'였다. 인류가 희생과 박애의 상징으로 떠받들던 그가 최근 산후 합병증으로 병원을 찾았다가 에볼라 재발을 의심한 의료진의 진료 기피로 출산 닷새 만에 숨졌다. 그의 죽음은 전염병에 대한 비이성적 공포와 사회적 편견, 임신ㆍ출산의 위험과 빈국의 열악한 모성 보건시스템을 충격적으로 환기시켰다. 사진은 2014년 회복 직후 국경없는의사회 에볼라 치료캠프에서 일하던 때의 그. 사진 국경없는의사회.

에볼라 출혈열은, 이제 치사율이 30%대로 떨어졌지만, 한때 90%에 이르던 악성 바이러스 전염병이다. 2014년 서아프리카 사태 때의 치사율은 40%대였다. 2013년 말 기니를 진앙지로 라이베리아와 시에라리온을 강타한 에볼라 출혈열은 세계보건기구(WHO) 집계로 2015년 6월까지 1만1,184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의사와 연구자들은 에볼라의 실체를 온전히 알지 못했다. 면역에 관한 한, 에볼라 출혈열이 처음 발병한 1970년대 이래 중복 감염된 예가 단 한 건도 보고되지 않았다는 게 그들이 아는 전부였다. 다시 말해 그들은 에볼라 치유자의 면역력을 100% 확신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경없는의사회(MSF, Medecins Sans Frontieres) 등 국제 의료구호단체 의료진들이 카르와와 같은 치유자들에게 도움을 청한 건, 그만큼 일손이 절박하게 필요해서였다. 저 희생자들 중 600여 명이 의료진이었고, 발병 초기 라이베리아의 의사는 전국에 50여명에 불과했다. 오랜 내전(1989~2003)의 후유증도 극복하기 전이었다.

그 전염병에 걸려 죽음 문턱까지 갔다가 회복된 뒤, 의료진의 요청에 응해 다시 그 사투의 현장에 뛰어든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재감염의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환자들과 살을 맞대며 간병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용기를 북돋워주곤 했다. 라이베리아의 28세 여성 살로메 카르와(Salome Karwah)는 맨 처음 그 일을 시작한 이들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자신처럼 바이러스에 면역된 이들을 ‘슈퍼 파워스(Super Powers)’라 부르곤 했다.

살로메 카르와가 제 몸의 면역력을 얼마나 신뢰했는지, 의사들이 어떤 말로 그를 설득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는 다시 사는 삶을 덤이라 여겼고, 재감염의 공포에 맞설 만큼 강했다. “MSF치료센터에 간 첫날, 시신들이 들려나가는 걸 보고는 친구에게 ‘나, 못하겠어’라고 울면서 말했어요. 하지만 바로 다음날 ‘그냥 우는 건 내 슬픔을 견디는 데 아무 도움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죠. 차라리 그들을 도우며 최대한 나를 바쁘게 하기로 결심했어요.”(Time, 2014.12.10) 수도 몬로비아 외곽의 MASF 치료센터는 불과 며칠 전 그의 부모와 삼촌과 숙모와 조카가 잇달아 숨진 현장이었고, 카르와와 언니 조세핀(Josephine)이 구사일생 살아난 곳이었다.

2014년 10월 라이베리아 수도 몬로비아 외곽의 한 마을. 방호복을 입은 의료진이 시신을 옮기는 모습이다. 이웃 기니에서 첫 환자가 발생한 것은 2013년 말이었고, 라이베리아의 국제의료단체들이 대비를 시작한 건 이듬해 초였지만, 정부가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한 것은 전염이 확산돼가던 8월이었다. 일부 고위공직자는 외국으로 도피하기도 했다. AP 연합뉴스

에볼라 출혈열은 극심한 두통과 고열로 시작돼 구토와 설사, 전신 근육통으로 악화하다 피부 발진과 점막 출혈까지 동반한다. 카르와의 증상이 시작된 건, 에볼라가 국경을 넘어 라이베리아로 번져가던 2014년 8월 중순이었다. 맨 먼저 환자 이송을 돕던 삼촌이 감염됐고, 이어 의사였던 아버지가, 어머니와 언니가, 카르와의 약혼자 제임스 해리스(James Harris)가 쓰러졌다. 그들은 8월 21일 치료센터로 이송돼 격리 수용됐다. 그 해 10월 가디언에 기고한 글에 카르와는 “에볼라는 마치 다른 행성에서 온 것처럼,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통증과 함께 찾아왔다. 뼈 깊숙한 곳까지 번져가는 고통이었다”고 썼다. 정신을 잃은 일주일 여 사이 부모와 친척들이 차례로 숨졌다. 치료제도 없었다. 생명 유지에 꼭 필요한 대증 요법들, 탈수가 심하면 수분을 보충하고, 통증과 혈압을 잡아주고, 영양분을 보충해주는 게 치료의 전부였고, 환자를 격리함으로써 전염을 통제하는 게 더 중요한 일이었다.

카르와는 32일 만에 병을 이기고 퇴원했다. 언니와 약혼자 해리스도 살아남았다. 한때 병원이었던, 그들이 몸을 추스르던 곳을 이웃들은 ‘에볼라의 집’이라 부르며 접근조차 기피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여성이 찾아와 자기 어머니를 치료센터로 옮겨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도우며 간호사 일을 익힌 카르와였다. 그는 남들이 모르는 에볼라 환자들의 고통과 공포를 알았고,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건 살아날 수 있다는 희망과 용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렇게 그는 MSF 치료센터의 심리상담 간호사가 됐다. 바이러스가 득시글거리는 환자들의 토사물을 치우고, 씻기고, 먹이고, 옷과 시트를 갈아주면서, 그는 환자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카르와는 “나는 내 일을 통해 행복감을 느끼며, 환자들을 내 아이처럼 대하고 있다”고 가디언에 썼고, 두 달 뒤 한 라이베리아 신문에는 “환자들을 더 많이 만날수록 내 슬픔을 더 잊을 수 있었고, 내 사연을 더 많이 전할수록 내가 점점 강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고 썼다. 약혼자도 그의 곁을 지켰다. 해리스는 “전신 보호복을 30분 이상 입지 말라는 게 센터 지침이었지만, 카르와는 2,3시간씩 예사로 병실에서 환자들과 대화하곤 했다”고 말했다.(npr, 2017.3.1)

병이 완전히 물러난 뒤인 2016년 1월 결혼한 둘은 문을 닫은 아버지의 병원을 다시 열어 어디서도 받아주지 않는 환자들을 치료하는 ‘슈퍼 클리닉’을 만드는 게 꿈이라고 했다.(Time, 2017.2.28)

결혼할 무렵 카르와는 셋째 아이를 임신 중이었다. 지난 여름 넷째 임신 사실을 안 부부는 낙태를 할까말까 망설이던 끝에 출산을 선택했다고 한다. 부부는 독실한 종교인이었다.(npr, 위 기사) 2월 17일 카르와는, 에볼라 치료기지로 큰 역할을 해낸 미국 자선재단 ‘사마리아인의 지갑(Samaritan’s Purse)의 국제기독교병원 ‘ELWA(Eternal Love Winning Africa)’에서 제왕절개로 넷째 예레미아(Jeremiah)를 낳았다. 그리고 사흘 뒤 퇴원한 지 채 몇 시간도 안 돼 경련과 함께 발작과 구토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남편과 언니는 카르와를 다시 병원으로 데려갔지만, 에볼라 감염을 의심한 의료진은 그를 외면했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 약 세 시간 동안 차에서 기다려야 했어요. 결국 내가 휠체어를 밀고 응급실로 데려갔죠.(…) 당직 의사조차 카운터 앞에서 페이스북을 들여다보며 다른 병원으로 데려 가라고만 했어요.” 해리스는 “퇴원할 때부터 아내의 혈압은 무척 높은 상태였다”고 말했다.(BBC, 2017.3.1) 급기야 해리스가 카르와와 함께 일하며 알고 지내던 한 전염병학자(Dr. Masoka Fallah)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청했고, 그 의사가 혈액검사로 에볼라 음성반응을 확인한 뒤에야 진료가 시작됐다고 해리스는 전했다. 카르와는 이틀 뒤인 22일 숨을 거뒀다. 향년 28세.

나이지리아 보건의료책임자(Chief Medical Officer) 프랜시스 카테(Francis Kateh)박사는 BBC 인터뷰에서 “남편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사인에 관한 한) 신중해야 한다. 병원 측은 그가 에볼라 감염자라고 판단하면서도 더 위험할 수 있는 수술을 해주지 않았나”라고 말했다. 3월 17일 현재, 라이베리아 보건 당국은 카르와의 정확한 사인을 밝히지 않고 있다.

2014년 12월 ‘타임' 표지의 살로메 카르와. 그는 국제의료진이 "스프레이를 들고 산불에 맞서는 형국"이라고 했던 서아프리카 에볼라 사태의 전사 중 한 명으로, 2014 타임 ‘올해의 인물’ 중 한 명으로 선정됐다.

임신과 출산은 그 자체로 위험한 일이다. WHO 집계 2015년 임신ㆍ출산과 직접 관련된 질병과 사고로 사망한 여성은 총 30만 3,000명. 1990년 53만 2,000명에서 지속적으로 줄긴 했지만, 아직 하루 평균 830.14명이 희생되고 있는 셈이다. 국가별 빈부차와 보건 수준 등에 따른 사망률 격차도 현저히 높아, 임산부 10만 명당 사망자 숫자로 나타내는 임산부 사망률(Maternal Mortality Ratio)의 세계 평균은 216(한국은 11)이지만, 에볼라 진앙지였던 기니는 679, 라이베리아는 725, 시에라리온은 1,360이었다.

라이베리아의 의료보건시스템은 내전과 에볼라 사태를 거치며 극도로 취약한 상태였다. 미국에 본부를 둔 국제보건 NGO ‘Partners in Health(PIH)’는 라이베리아 정부의 2016년 보건 예산이 국민 1인당 연 50달러에 불과하다며 “카르와와 같은 산모에게 그건 사망선고와 다름없는 수준”이라고 썼다.(romper.com, 2017.3.1) 2016년 6월 PIH 홈페이지 블로그에는 라이베리아 산과병동의 실상을 소개하는 글이 실렸다. 상수도시설이 없어 분만실에서도 물을 길어 써야 하고, 전기도 끊겨 밤에는 석유램프를 밝히고 있고, 우기에는 천장이 새서 의료진이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발을 벌린 채 분만을 돕는다는 이야기. 응급상황에도 구급차를 부르려면 휴대폰 송신이 가능한 곳까지 달려가야 하는데 앰뷸런스 기사가 용케 수신가능지역에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 대부분 초등학교도 못 마친 10대~ 20대 초반의 산모들은 산통이 올 때까지 가사노동을 하기 때문에 병원보단 집에서 아이를 낳는 일이 잦다. PIH 라이베리아 지역보건감독 흐네데 콘디(M. Hnede A. Kondy)는 “(난산일 경우) 남자를 불러 회초리로 산모를 때리게 하거나 불개미를 몸에 풀어놓게도 한다”고 말했다. 질 파열 등으로 산모와 아이가 위험해지는 일도 물론 잦다. 다치고 병드는 임산부 통계는 WHO에도 없다.

PIH에 따르면 라이베리아는 인구 420만 명에 약 1,400명의 간호사가 있다. 비슷한 인구의 미국 켄터키 주 간호사는 약 4만 명이다. PIH가 지원하는 J.J 도센 메모리얼병원 산과병동에는 네 명의 간호사가 시간당 1.25달러의 급여를 받으며 하루 평균 46명의 임부를 상대한다. PIH가 라이베리아 당국과 함께 산모 보건증진사업을 벌이기 시작한 건 지난해부터였다.

카르와의 죽음을 특종 보도한 ‘Time’을 비롯한 주요 외신들은 에볼라에 맞서 지역사회를 구원한 ‘에볼라 전사’가 다른 사람도 아닌 의료진의 무지와 편견, 치유자를 잠재적 위험인자로 여기는 사회적 낙인 때문에 숨졌다는 뉘앙스로 그의 소식을 전했다.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사태 당시 의료구호단체는 바이러스와의 전쟁 못지않게 주민들의 경계심과 배척 때문에 큰 어려움을 겪었고, 치료센터를 철수해야 했던 일도 있었다.

반면 PIH 등 보건의료 활동가들은 빈국의 의료보건 실태, 특히 산모 보건에 초점을 맞춰 그의 죽음을 주목했다. 미국 대중과학 잡지 ‘scientificamerican’의 필자 시마 야즈민(Seema Yasmin)은 “살로메 카르와는 긴 내전과 바이러스와의 싸움에서 살아 남았지만, 라이베리아에서는 출산 자체가 자주 살인자가 되곤 한다”고 썼다. 카르와와 함께 일하며 2014년 ‘Time’ 커버스토리 ‘The Ebola Fighters’에 소개되기도 했던 MSF 소속 보건의 엘라 왓슨 스트리커(Ella Watson-Stryker)는 “(카르와는) 에볼라로부터 살아남았지만, 더 거대하고도 은밀한 전염병(epidemic)인 보건시스템의 실패에 희생당했다. 할 말이 없다…”고 말했다.

엄마 얼굴도 못 본 막내를 포함해 6살 미만 네 아이를 도맡은 해리스는 “살로메는 아내이기 이전에 내 친구였다. 그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고, 조세핀은 “동생은 최근까지도 생존자 모유 감염 검사 등 정부 일을 도왔다”며 “그는 더 나은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제부터 나는 더 이상 치유자가 아니다.(…) 만일 내가 아파 병원에 가더라도 나는 나 자신을 감출 것”이라고 말했다.

20쪽에 달하는 2014년 타임지 커버스토리는 “스프레이를 들고 산불과 맞섰던” 초기 에볼라 전사들의 고투와 함께 ‘안개 전쟁(fog of war)’이라 불렀던 그 전쟁이 끝난 뒤 안개가 걷힌 자리에 남은 진실들에 대해 썼다. “이 싸움이 결코 끝이 아니라는 사실. 다음 전쟁이 시작될 때 우리는 더 잘 대비하고 있어야 하고 덜 두려워하며 더 잘 싸워야 한다는 사실, 그러기 위해서라도 2014년의 그들을 기억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카르와의 죽음은 거기에, 아무리 불편해도 잊지 말아야 할 또 하나의 진실을 보탰다. 우리의 전장에는 에볼라 바이러스 같은 명확한 적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 다른 듯 다르지 않은 더 지독한 적들이 있고 전장 안에 또 다른 전장이 있다는 사실. “할 말이 없다”는 MSF 활동가의 비탄과 “이제 나를 감출 것”이라는 조세핀의 분노 어린 절규를 결코 외면하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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