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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종호의 판사의 길] 판사의 권한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입력
2017.03.16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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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1994년에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사법연수원을 거친 뒤 1997년 2월 27일 판사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2007년 2월 27에 이어 올해 다시 연임발령을 받았다. 올해는 첫 번째 연임발령 때와는 달리 연임발령을 받은 법관들을 위해 새 법복을 지급해 주는 의식을 진행한다고 하니 감회가 새롭다. 아무리 오래 입어도 내 것이 될 수 없는 옷이 바로 법복이다. 법복은 국민들로부터 잠시 빌려 입은 옷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법관은 '대법원장', '대법관' 및 ‘대법원장과 대법관이 아닌 법관’으로 나뉜다. 대법원장과 대법관이 아닌 법관을 ‘판사’라고 하는데, 그 임명 절차는 대법원장 및 대법관 임명 절차와는 사뭇 다르다. 대법원장은 국회의 동의를 받아 대통령이 임명하고, 대법관은 대법원장의 제청으로 국회의 동의를 받아 대통령이 임명한다. 하지만 판사는 인사위원회의 심의를 거치고 대법관회의의 동의를 받아 대법원장이 임명한다. 이처럼 판사는 대통령이나 국회의원과 같이 투표로 선출되는 것이 아니라 대법원장의 임명만 있으면 되고, 그 임명에 있어서는 인사청문회도 필요치 않다. 그럼에도 판사의 권한은 주권자인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헌법 제1조 2항에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이 점을 명시해 두고 있다. 국민이 직접 임명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판사 권한의 ‘민주적 정당성’의 근거는 바로 국민주권에 있다. 판사가 현행법상 심지어 형사 피고인에게 사형을 선고할 권한까지 부여 받은 무거운 직책임에도 불구하고 그 직책을 부여함에 있어 주권자의 개입이 직접적이지 않다는 점을 들어 판사의 권한에 대한 민주적 정당성이 다른 선출직 공무원과 비교해 약하지 않느냐는 의문을 제기할 여지도 없지 않다. 이러한 점을 들어 판사직의 임명에 있어 민주적 정당성을 강화할 장치를 두어야 한다는 주장도 간혹 제기된다.

그 때문인지 우리 헌법은 법관에 대해 ‘종신직’이 아닌 ‘임기직’을 채택하고 있다. 우리 헌법 제105조는 대법원장의 임기는 6년으로 하며 중임할 수 없고, 대법관의 임기는 6년으로 하되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연임할 수 있으며, 판사의 임기는 10년으로 하되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연임할 수 있다고 규정하여 법관의 임기를 명시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판사의 경우 임기 만료를 앞두고 계속 판사직을 수행하려면 연임발령을 받아야만 한다. 그렇지 못하면 임기만료로 판사직에서 물러나야 한다. 판사에 대한 연임발령권은 판사 임명권과 마찬가지로 대법원장이 보유하고 있는데, 대법원장이 연임발령을 내리기 위해서는 인사위원회의 심의를 거치고 대법관회의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대법원장은 신체상 또는 정신상의 장해로 판사로서 정상적인 직무를 수행할 수 없는 경우, 근무성적이 현저히 불량하여 판사로서 정상적인 직무를 수행할 수 없는 경우, 판사로서의 품위를 유지하는 것이 현저히 곤란한 경우 중 어느 하나에 해당한다고 인정되는 판사에 대해서는 연임발령을 하지 아니한다.

결국 법복 대여기간은 10년인 셈이다. 그런데 빌리는 것에는 무엇이든 그만한 책임이 따르기 마련이다. 판사가 10년 동안 국민들로부터 신분과 권한을 위임 받아 법정에서 소임을 다하는 것처럼, 법복을 빌려 입게 한 것도 그 권위에 기대어 잠시 빌린 것이라는 걸 잊지 말라는 뜻 아니겠는가.

판사직 나아가 사법부에 대한 민주적 정당성을 보장받는 최후의 보루는 주권자로부터 신뢰를 얻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 국민의 사법부에 대한 신뢰도는 자랑할 만한 것이 못 된다. 지난 20년간 사법부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 사법부의 신뢰를 쌓는 일이 신들의 일에 끼어들다가 벌을 받아 언덕으로 돌을 굴러 올리는 일을 무한 반복하는 시지프스와 같다고 생각한 적이 많다. 시지프스가 사력을 다해 언덕 정상을 향해 돌을 밀어 올리나 그 돌이 어처구니없게 정상 부근에서 다시 아래로 굴러 떨어지므로 처음부터 다시 같은 고행을 반복해야 하듯이 사법부의 신뢰 쌓기도 그런 과정을 되풀이해 오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아마도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시지프스의 고행은 천형(天刑)이기에. 하지만 그렇다고 국민의 신뢰 확보를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국민적 정당성을 포기하는 순간 사법부의 존립 근거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두 번째의 연임발령으로 다시 10년간 판사직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지난 20년간, 특히 지난 7년간 소년부판사로서 무탈하게 판사직을 수행할 수 있었던 데에는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 드린다. 옷을 갖춰 입는 것은 일종의 의식이다. 법복을 입는 행위 역시 마찬가지다. 법복을 입는다는 것은 법관의 마음가짐을 보여주는 형식이자 법정과 판결 앞에서 예의를 갖추는 일이 될 것이다. 다시 10년간 법복을 빌려주신 주신 국민들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새 법복에 부끄럽지 않은 차용인이 되기를 소망한다.

천종호 부산가정법원 부장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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