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한 당신] 어윈 코리

코미디언 어윈 코리는 스스로를 "세상에서 가장 권위있는" 사람으로 만든 뒤, 권위에 짓눌린 이들에게 자신을 우스갯거리로 선사했고, 우스운 줄 모르고 우쭐대는 세상의 권위를 조롱했다. "시대를 통틀어 가장 똑똑한 희극인"이라 불릴 만큼 그는 실제로 박식했지만, 그는 자신의 앎의 부피를 희극적으로 과장함으로써 자신을 감추곤 했다. 그는 진짜 코미디는 권위에 맞서는 용기에서 비롯된다고 믿었다. 사진은 1982년 공연음반 재킷.

1974년 전미도서상(National Book Award) 소설부문 수상자로 아이작 싱어와 함께 ‘중력의 무지개’의 작가 토머스 핀천(Thomas Pynchon, 1937~)이 뽑혔다. 시상식이 열린 4월 18일 뉴욕 예술극장 앨리스 툴리(Alice Tully)홀. 낯가림 심한 핀천은 다수의 예상대로 불참했고 대리 수상자로 나타난 이가, 뜻밖에도 코미디언 어윈 코리(Irwin Corey)였다.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자다 깬 듯 부스스한 헤어스타일에 낡은 연미복, 하이-탑 운동화 차림으로 연단에 선 그는 수상 소감으로 이런 ‘말’을 했다.

“(…)하지마안(howEver), 우리는 프로토콜이 절차에 우선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원심력을 만들어내는 관성 상태에 기반한 폴 린지 의사진행 규칙은 촉매적 매개체라기보다는 촉매 그 자체로서 변화 반응을 촉진하며, 시작서부터 언제나 토종 장미(an indigenous brier)로 남아 있습니다. 이것은 접선(tangent)으로 쓰인 초점이며, 그 덕에 만병통치약에서 담즙이 추출되는 것입니다(…).”(nypress.com, 2001.11.13)

코리를 잘 알던 한 출판인의 장난스런 제안에 핀천이 흔쾌히 동의하면서 이뤄진 저 해프닝은, 코리의 코미디 중에서도 특히 돌출적인 공연이었다. 세상의 질서와 상식에 어깃장을 놓듯 ‘하지마안’으로 말문을 열고는, 화학 생물학 경영학 철학을 넘나드는 전문 용어들을 마구잡이로 끌어다 대는 그의 뜻 모를 연설에 어떤 이들은 박장대소했고 또 일부는 어리둥절해했다고 다음날 뉴욕타임즈는 전했다.(NYT, 2017.2.7) 행사 직후 누가 연설 요지를 묻자 그는 “결혼을 하려거든 돈 많은 여자와 하라는 거였다”고 말했다.

미국의 전설적 희극인 레니 브루스(Lenny Bruce, 1925~1966)가 “온 시대를 통틀어 가장 머리 좋은(brilliant) 코미디언 중 한 명”이라며 존경했던 어윈 코리Irwin Corey)가 2월 6일 별세했다. 향년 102세.

코리는 체제와 권력, 또 그것들을 감싸고 부역하는 온갖 전문적인 아첨꾼들을 조롱하며, 그들이 외면한 세상을 웃음으로 보듬고자 했던 코미디언이었다. 르네상스의 지식인을 방불케 하는 폭넓은 독서와 로마의 이름난 웅변가들이 살아와도 탄복했을 유창한 언설로 그는 극장과 라디오 TV 영화 등 미국 코미디의 거의 모든 시장을 누볐다. 그의 학력은 고교 1년 중퇴가 전부였지만, 그를 소개하는 이들은 그의 이름 앞에 “세상에서 가장 권위 있는 전문가(the world’s foremost authority)”라는 말을 앞세우고, ‘교수’라는 직함으로 그 이름을 받치곤 했다.

세상의 시선 따위엔 무심한 듯 남루하지만 근엄한 옷차림, 그런 세상을 내려다 보듯 젠체하는 표정과 어투, 난해한 학술 용어와 개념어들을 버무린 장광설로 그는 청중의 혼을 빼놓다가도 그 사이에 흘려 들을 수 없는 한두 마디를 끼워 넣곤 했다. 가령 “세상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물리학자” 코리 교수는 벡터나 스칼라 같은 용어들로 청중을 아득한 전문가의 세계로 끌고 가다가 “만일 우리가 지금 방향을 바꾸지 않으면, 우리는 결국 이 길에서 멈추게 될 것(If we don’t change direction soon, we’ll end up where we’re going)”이라거나 “당신이 어딜 가든, 거기 당신이 있을 것”이라는 식의 말을 슬쩍 끼워 넣곤 했고, 모처럼 알아들을 만한 말을 만난 청중들은, 거기 담긴(혹은 담겼을지 모르는) 의미를 알레고리처럼 찾곤 했다. 저널리스트 짐 니펠(Jim Knipfel)에 따르면 마피아 알 카포네가 했다는 유명한 말, “친절한 말로 얻을 수 있는 것보다, 친절한 말에 총을 곁들이면 더 많은 걸 얻을 수 있다”는 것도 코리가 처음 한 말이었다.(nypress, 위 기사) 비평가 케네스 타이넌(Kenneth Tynan)은 코리(의 아바타)를 “미국에서 가장 웃기고 기괴한 캐릭터”이자 “대학 나온 채플린의 광대”라고 불렀다. (irwincorey.org)

그의 젠체하는 말투와 과장된 권위는 삶을 유리시키는 권력과 권위, 위선의 지식(인)에 대한 조롱이었다. 온갖 ‘전문적인 것’들로부터 소외됐거나 소외돼 있다고 여기는 이들은 스스로를 웃음거리로 내놓곤 하는 ‘세계 최고의 권위자’에게서 열광하며 위안을 얻곤 했다. 코리는 “내가 하려는 건 사람들이 스스로를 감싸곤 하는 어떤 고결함(righteousness)의 거품에서 바람을 빼버리는 일이다.(…) 우리 주변에는 자신의 견해를 마치 갈릴리 산에서 듣고 온 것처럼 여기는 자들이 있지 않은가”라고 말했다.(NYT, 위 기사)

코리(irwincorey.org)는 자신의 이력 가운데 두 가지를 특히 자랑스러워했다고 한다. 하나는 그가 뉴욕 브루클린의 한 고아원(Brooklyn Hebrew Orphan Asylum) 출신이라는 거였고, 또 하나는 전미 아마추어 복싱리그인 골든글로브(Golden Gloves) 페더급 무패의 챔피언 출신이라는 거였다.

그는 1914년 7월 29일 브루클린에서 술집 종업원이던 아버지와 재봉사 어머니(Jenny)의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직후 아버지는 가족을 내팽개치고 집을 나갔고, 혼자 가족을 건사하던 제니는 결핵을 앓게 되면서 남매를 고아원에 맡겼다. 제니는 남매 중 누구도 다른 집에 입양을 보내지 말라는 조건으로 월 30달러씩 고아원에 돈을 냈다. 코리는 고아원 아이들을 즐겁게 해주느라 그 무렵부터 코미디를 시작했다고 말했지만, 그도 자신의 연기를 통해 현실을 비틀고 뿌리치고, 한사코 따라붙는 것들은 흘겨보기도 하면서 그 세월을 버텼을 것이다. 그가 그 시절을 평생 자랑스러워한 것은, 그가 지니고자 했던 약자ㆍ소수자 근친성과 생래적 좌파 정체성에 대한 다짐 같은 거였다. 일가가 다시 모여 살게 된 건 코리가 13살 되던 27년 무렵이었다.

다큐멘터리 감독 조던 스톤이 제작한 어윈 부부의 2013년 다큐멘터리 'Irwin & Fran'의 한 장면. 친구였던 배우 수전 서랜던이 내레이션을 맡은 저 작품은 그해 'The People's Film Festival'의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했다.

고교 1년을 마치자마자 그는 실업자들이 득시글거리던 대공황기의 캘리포니아로 건너가 노동을 했고, 38년 뉴욕으로 돌아와서는 뉴딜 공공근로(Civilian Conservation Corps)’ 인부로도 일했다. 봉제공들의 노동조합을 소재로 한 뮤지컬 코미디 ‘Pins and Needles’의 배우겸 보조 작가로 일하며 밥을 벌기도 했다. 극단 배우조합을 만들려다 해고를 당한 게, 아이러니하게도 그 공연 때였다. 잠깐 했던 복싱은, 그로선 말(연기) 대신 주먹질이 나을까 싶어서였을지 모른다. 콜드게임으로 챔피언이 되자마자 곧장 은퇴한 것은 역시 세상을 때리는 덴 코미디만 한 게 없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40년대의 인기 브로드웨이 쇼 ‘New Faces’는 사실상 그의 데뷔무대였다. 코미디언으로 인기를 얻으면서 그리니치빌리지의 간판 극장 ‘빌리지 뱅가드 Village Vanguard’의 고정코너를 맡기도 했다. 말문을 열 때마다 과장되게 외치곤 하던 ‘howEver’가 시작된 것도 거기서였다. “뱅가드에서 공연하던 어느 날 20cm쯤 되는 높이의 무대에서 발을 헛디뎌 넘어졌는데, 일어나면서 무심결에 했던 말이 그 말이었어요.”(thevillager.com, vol 74)

그 무렵 이미 그는 뉴욕 코미디 극장 무대에서 ‘코리 교수’로 불리곤 했다. 2차대전이 터졌고, 세 차례 징집을 연기하던 끝에 어쩔 수 없이 그도 입대했다. 그는 탁월한 연기력으로 동성애자 행세를 해서 6개월 만에 쫓겨나(?) 브로드웨이로 복귀했다. 찰리 채플린이 무성영화로 추구했던 권력과 자본, 지식인 계급의 위선에 대한 조롱과 풍자를 그는 직접 쓴 개그와 애드립으로 해내곤 했다. 니펠은 “어윈 코리는 1930년대부터 지금 우리가 아는 즉흥코미디를, 그것도 혼자 힘으로 창조했다”고 말했다.

작가이자 방송 프로듀서 마이라 채닌(Myra Chanin)이 허핑턴포스트 블로그에 썼듯이 그는 엄청난 다독가였고, 자신이 엉터리로 구사하는 전문용어들의 의미를 알던 지식인이었다. 사람들은 그의 연기를 잘난 척하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는 거꾸로 자신의 진면목을 감추느라 애를 먹었을 것이다. 그의 코미디는, 배우가 무대에서 발을 헛디디듯, 진짜 코리가 실수로 튀어나오는 순간순간 빛이 났다.

-러시아 발레리나들과 쿠바 야구 선수들이 자기 나라를 버리고(defect) 미국으로 오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결함 많은(defective) 나라이기 때문이죠.

-미국 대통령들이 지닌 유일하게 좋은 점은 그들 대부분 죽었다는 사실 아닌가요.

-부시요? 저라면 차라리 부시의 아들(son of Bush)이 되기보단 개새끼(son of bitch)가 될 거예요.(thevillager.com, 위 기사)

쿠바 위기가 한창이던 1960년대 초, 외교적 긴장을 해소할 방법을 묻자 ‘세계 최고의 외교 전문가’ 코리 교수는 “플로리다를 잘라 미시시피 강에 띄워 500마일쯤 흘려 보내면 됩니다. 그럼 지정학적 긴장도 해소할 수 있고, 최소 900만 명의 실직자에게 좋은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을 겁니다”라고 말했다.(orlandosentinel.com, 2014.7.29)

몰론 그가 늘 정치 개그만 한 건 아니었다. “결혼은 ring(반지) 세 개로 이뤄지죠. engagement ring(약혼반지))와 wedding ring(결혼반지) 그리고 suffering(고통)입니다”라거나 “결혼은 은행계좌와 비슷합니다. 넣었다가 빼면 이자(interest, 혹은 흥미)도 없어요.”같은 좀 덜 심오한 것들도 있었다.

그는 1939년 한 공산주의자 캠프에서 만난 프랜 버먼(Fran Berman, 2011년 작고)과 결혼, 아들 한 명을 두고 해로했다. 그는 공산당에 입당 원서를 냈다가 너무 좌파-미국공산당은 그를 무정부주의자라 판단했다고 한다(##10)-라 거부당한 이야기를 그는 농담처럼 하곤 했다. 1960년 휴 해프너의 ‘플레이보이’ 공천(?)으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어윈에게 투표해서 실업수당(get on the dole)을 받으세요”라는 구호로 선거운동을 펼친 적도 있고, 60년대 쿠바를 방문해 피델 카스트로에게 아동 의료기금 4만 달러를 기부하기도 했다. 그의 집 거실에는 피델과 함께 찍은 사진이 늘 걸려 있었다.

1994년 80세 되던 해부터 말년까지 코리는 뉴욕 맨해튼의 한 거리에서 노숙자같은 차림으로 신문을 팔았다. 그렇게 번 돈을 쿠바 아동의료복지기금으로 기부했다. 그의 에이전트는 저 일을 "연기의 연장"이라고 했지만, 코리에게는 연기가 곧 삶이었을 것이다. 유튜브.

코리는 80세 되던 94년 무렵부터 말년까지 매일 오전 11시면 허름한 옷을 입고 맨해튼 3번가 건널목 앞에서 신호 대기중인 차에 다가가 신문을 팔고 구걸을 했다. 아무 말 없이 손을 내밀면 동전을 주는 사람도 있고, 창문조차 내리지 않는 이들도 있고…. 노숙자 차림에 보행 보조기(그건 분장이 아니었다)를 밀고 다가오는 왕년의 스타를 알아보는 이는 드물었다. 그가 쓴 야구모자의 문구들- 예컨대 ‘엉클 샘은 정말 나쁜 놈(big bully)!’ 혹은 ‘뇌물이 워싱턴을 지배한다’거나 ‘부패 정부를 교체하자’등-을 눈 여겨 보는 이도 드물었을 것이다. 2011년 10월 뉴욕타임스는 그가 그 구걸을 장장 17년 동안 거의 매일 해온 사실을 소개하며, 멋진 저택을 두고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는 “사람들을 돕고 싶어서”라고 말했다. 평생 그의 에이전트로 일한 어빙 아서(Irvin Arthur, 당시 85세)는 “어윈에게 그 일은 연기(演技)의 연장”이라고 말했다. 물론 그에게 연기는 곧 삶이었다. 그는 구걸로 번 돈 수만 달러를 꼬박꼬박 쿠바 아동의료복지기금으로 기부했다.

2014년 7월 그의 100세 생일 파티가 뉴욕 액터스 템플(Actors Temple)에서 열렸다. 거동도 불편하고 귀도 어두워진 그는 참석자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10년 전 이 자리에는 조니 캐쉬(Johnny Cash, 가수, 2003년 작고)도 있고, 밥 호프(Bob Hope, 배우, 2003년 작고)도 있고, 스티브 잡스(2011년 작고)도 있었는데…, 이제 캐쉬(돈)도 없고, 호프(희망)도 없고, 잡스(일자리)도 없네.”(npr.com, 2017.2.7)

2001년 인터뷰에서 어떤 계획이 있냐고 묻자 87세의 그는 “나는 계획 같은 거 세워본 적 없고 지금도 없다.(…) 그냥 묵묵히 나아가는 거다. 내가 마실 공기가 있고, 발 아래 땅이 있으니, 내가 움직일 수 있는 한…”(#1)이라고 말했다. 아들 리처드(Richard)는 “아버지는 평생 자신의 행로(tangent)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탈선하면서 늘 탈선을 꿈꿨다”고 말했다.(#10) 그 말은 젊은 날의 그의 개그 “지금 방향을 바꾸지 않으면 끝내는 이 길 위에서 끝나게 될 것”이라는 말에 대한 스스로의 대답이었을 것이다. 1970년 워싱턴포스트 인터뷰에서 그는 “예술가의 역할은 거역하는 것이다. 모든 위대한 것들이 그러했다”고 말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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